히브리서 주해 (11)
1. 본문주해(히11:1~7)
본문개관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장이다. 10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박국으로부터의 인용에 의해서 소개된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1장은 시작과 끝에서 믿음에 의해 증거를 얻는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수미상관구조를 이루고 있다(1-2절; 39-40절). 표면적인 구조로 보면 10:36절에서 인내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과 12:1절에서 인내를 촉구하는 권면 사이에 위치한 부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11장은 앞뒤 내용과 더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요구되는 인내는 아주 특별한 기반을 가지는데, 그것은 이전의 영웅들과 순교자들에 의해서 본으로 제시되어지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히 실현된 믿음이다.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긴 목록 이후에 12장 초반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을 통해 절정에 이른다. 인용된 믿음의 영웅들의 예들과 그들에 대한 평가에 의해서 히브리서 설교자는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또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원하는 믿음의 개념을 더 깊고 풍부하게 만든다. 11장은 크게 서론(1~3절), 믿음의 인물을 통한 모범들(4~38절), 그리고 결론(39~40절)으로 나눌 수 있다. 내용적으로는 4-31절에서는 창세기로부터 여호수아서로 순서를 따라 다루면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믿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밝힌다. 여러 인물들 중에서 아브라함, 사라, 그리고 모세에게는 특별한 강조가 주어진다. 그리고 나서 사사시대로부터 마카비 반란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며(32~38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한 고난에 초점을 맞춘다. 첫 번째로 다루게 될 1~7절은 믿음에 대한 정의(1~2절), 믿음을 통해 접근 가능한 사건으로서의 창조(3절), 아벨(4절), 에녹(5~6절), 그리고 노아(7절)에 대해서 다룬다. 이 단락에서는 ‘증거를 받다’는 의미의 ‘마르튀레오(μαρτυρέω)’ 동사의 사용이 두드러진다(2, 4, 5절에서 수동태로; 4절에서 능동태로).
절별 주해
11:1~3절 : 믿음이란
이 구절은 믿음 장의 서론에 해당한다. 1~2절에서 구체적인 경험으로서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된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실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주로 assurance 혹은 realization으로 번역된다. ‘증거’라는 단어는 ‘엘렝코스(ἔλεγχος)’인데 영어성경들에서는 conviction이나 evidence로 번역되었다. 간략하게 믿음에 대해서 정의하면, 믿음은 목표를 가지고 소망하는 것을 거지는 것이고 지각할 수 없는 실체를 지각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는 하나님(27절, 보이지 않는 자), 그의 존재(6절), 그의 신실하심(11절), 그의 능력(19절)과 같은 현재, 미래 혹은 영원한 실재를 포함한다. 믿음이 제공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인식은 고난과 시련을 견디는 기본적인 동기가 된다. 믿음의 사람들의 명단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창조 세계에 대해 인식하는 사람은 ‘우리’다.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보이는 세계를 창조하시고(3절) 존재하시며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고(6절), 또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 믿음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된다. ‘믿음으로 선진들이 증거를 얻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반응한 그들을 인정하셨다는 의미다. 그러나 39절에서 그들은 믿음으로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은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럼 과연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차이를 알아야 11장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계속 11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4절 : 아벨의 믿음
믿음의 목록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는 인물은 아벨이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창 4:4절의 내용에 근거해서 설명한다. 아벨은 그의 형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사를 기뻐하신 반면에 그의 형 가인의 제사는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것으로 인해 형제간의 다툼(sibling rivalry)이 발생하여 가인은 이성을 잃고 그의 동생을 죽였다. 아벨은 성경에 그려진 첫 번째 살인의 피해자다. 파일로는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진 이유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며, 아벨의 제물은 질적으로 더 나은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요세푸스의 경우에는 아벨의 제사는 문명에 반대되는 자연 그대로의 제사여서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경에서 근거를 찾기 힘들고, 오히려 Palestinian Targum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아벨과 가인의 믿음의 차이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6절을 근거로 이해하면, 아벨의 믿음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었던 그의 신앙이 그가 드린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 되게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또 주목해 볼 부분은 그는 비록 형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비록 죽었지만 그는 여러 세대를 통해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12:24절에도 아벨의 피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아벨의 피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어떤 유대교 전통에서는 아벨의 피는 하나님의 복수를 요구하는 순교자의 피라고 이해한다(1 Enoch 22.7). 요세푸스는 아벨의 피는 그의 의로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그런데 히브리서 설교자는 히 12:24절에서 아벨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를 비교하고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소리로 이해할 수도 있다.
5~7절 : 에녹과 노아
다음 믿음의 인물은 에녹이다. 창세기 5:24절의 “에녹이 하나님과 동해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신비한 언급은 칠십인경과 중간기 문헌에서 에녹의 하늘로의 승천으로 이해되었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이러한 것을 알았는지,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에녹이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성경적인 자료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는 주장을 위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6절은 하나님에 대한 에녹의 바른 지식, 즉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이 그가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옮겨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1절의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언급을 암시한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인식할 수 없는 어떤 진리나 실체가 아니라 미래에 있게 될 홍수사건이다. 노아는 이러한 경고에 대해 경건하게 반응했다. 이것은 5:7절에서 예수님의 경우에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던 내용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를 준비하여 가족들을 구원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을 정죄하였다는 내용은 은유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의 신실한 반응은 당시 사람들의 불의함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히브리서 설교자는 문자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일 수도 있는데, 전승에 따르면 노아가 사람들에게 가서 회개를 선포했으나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노아의 메시지를 받기를 거절했기에 그들은 저주를 받았다. 이런 노아의 믿음의 행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불의에 물들지 않고 의를 지켜낸 것이다. 아벨, 에녹, 노아의 공통점은 불의와 멀리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정하셔서 그 세대로부터 그들을 취하셨다. 아벨은 죽음으로, 노아는 옮겨짐으로, 노아는 홍수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노아와 에녹 이야기에서는 ‘죄인들의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주제가 두드러진다.
2. 본문주해(히11:8~16)
본문개관
이 단락에서 다루는 인물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중요하게 언급하는 몇 가지가 있다. 그것들은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주(8절), 약속의 땅에서 그가 이방인으로 거주함(9절), 그가 거기에 머물도록 했던 믿음(10절), 사라와 더불어 아들에 대한 약속을 받음(11~12절), 그리고 이방인으로 거하는 것(13~16절)이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구약에서 이미 믿음의 조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창세기 15:6절(“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논증에 있어서도 핵심구절이다(롬 4:3; 9:22, 23: 갈 3:16).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이 구절을 사용하지 않는다. 비록 6:13~15절에서 히브리서 저자의 마음에 창세기 15:6절의 구절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11장에서는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다룬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들로부터도 또 어떤 땅으로부터도 분리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으로 받은 땅인 ‘이방의 땅’으로 나아갔고, 거기서 그는 ‘이방인’으로 살았다. 아브라함이 그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산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를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묘사는 행 7:5~6절의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과도 잘 일치한다. 또한 후손의 약속도 하나님의 약속과 일하심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자식을 낳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방식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았던 이들, 즉 이어지는 단락에서 다루게 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족장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 그들은 약속을 성취하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며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 그렇게 한 것은 그들에게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별 주해
8~10절 : 땅의 약속
아브라함을 이상적인 인물로 그리는 것은 당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서 널리 받아들여졌고 그의 이야기는 다양한 강조를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 구절에서는 창세기 12: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아브라함이 순종했다는 것은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다. 히브리서 설교자사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의 순종이다. 실제 창세기의 내용에서는 믿음과 순종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히브리서에서는 순종과 믿음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믿음의 궁극적인 본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고(5:7), 구원은 그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진다(5:9). 아브라함은 순종하며 나아갔다. 그의 목표는 유업으로 받을 땅이었다. 이 부분에서 믿음의 미래적인 전망이 등장하는데, 이어지는 부분에서 더 두드러진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가나안에 도착한 후에야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곳이 어딘지를 알 수 있었다. 독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이 아브라함과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땅이 아닌 곳에 임시적인 거주자로 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믿음의 반응과 기대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은 일시적인 거주자의 삶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후손들과 더불어 그곳에 거했다. 10절에서는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바라보았던 곳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기다린 도시 혹은 성이 어디일까? 이 구절에서는 모호하지만, 곧 그것은 믿음의 순례를 하는 모든 자들이 이르고자 하는 하늘의 예루살렘(12:22), 더 나은 본향(14~16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1~12절 : 후손의 약속
11절에서 사라가 언급된다. 우리말 개역개정에서는 사라를 주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어려움이 있다. ‘잉태할 수 있는 힘(뒤나민 에이스 카타볼렌 스페르마토스 δύναμιν εἰς καταβολὴν σπέρματος)’은 남자에게 사용된 표현이다. 그렇게 했을 때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는 ‘사라 자신도(카이 아우테 사라 καὶ αὐτὴ Σάρρα)’가 주격인데 어떤 사본에는 여격으로 묘사된 것도 있다. 본문비평을 통해 여격으로 읽으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단산한 사라와 더불어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는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로 번역할 수 있다. 여전히 아브라함이 믿음의 주체가 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창세기 본문에서 사라는 약속을 믿지 않는다. 회의적이다. 다른 하나는 12절에서 수많은 후손이 주어진 것을 말할 때 다른 ‘죽은 자와 방불한(네네크로메누 νενεκρωμένου)’과 ‘한 사람(헤노스 ἑνὸς)’은 헬라어 문법에서 남성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놀라운 결과가 일어나게 했다. ‘하나’에서 ‘수많은’ 후손이 생겨났다. 히브리서는 수많은 후손이 생겨난 것이 기적적인 일임을 전달하기 위해 ‘실제로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3-16절 : 더 나은 본향
11장의 특징 중의 하나가 ‘믿음으로(피스테이 πίστει)’라는 말로 시작되는 구절이 많다. 지금까지 살핀 구절들에서는 3, 4, 5, 7, 8, 9절에서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13절에 와서 그 패턴이 깨뜨려진다. 13절에서는 ‘믿음을 따라(카타 피스틴 κατὰ πίστιν)’가 사용되었다. 17절부터 다시 ‘믿음으로(피스테이 πίστει)’라는 말로 시작된다. 13절의 ‘이 모든 사람들’이 누구일지 학자들이 많은 논란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은 에녹을 제외한 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렇다면 13절 하반절에서 이들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는 말과 14~16절의 내용이 그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13절의 이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믿음 안에서 죽은 그들은 약속한 것들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6:15절에서 아브라함에 대해 말하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약속들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6장에서의 약속은 자식에 대한 약속이었고 그것은 성취되었다. 지금 말하는 약속은 족장들로 하여금 이방인처럼 지내게 하는 약속이다. 그들의 약속의 실체를 아직 받지 못했다. 그들은 진정한 고향에 이르지 못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은 멀리서 약속된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고백했다. 이 땅에서 그들은 하늘 본향을 찾는 자로 살아갔다. 그들 자신이 떠나온 본향을 생각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모했던 것은 이 땅의 본향이 아니었다. 더 나은 본향, 즉 하늘에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히브리서에서 비교와 대조를 할 때 많이 사용한 ‘더 나은(크레이토노스 κρείττονος)’이라는 단어를 사용되고 있다(1:4; 2:9; 7:19, 22; 8:6; 9:23; 10:34; 11:35, 40; 12:24 참고). 이렇게 그들이 사모하고 찾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반응하신 내용이 소개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연상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족장들을 기뻐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
3. 본문주해(히11:17~31)
본문개관
이 단락에서는 믿음의 인물들의 명단이 3~12절에서와 같이 “믿음으로”라는 말로 시작한다. 12절에서 일단락 지어졌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었던 아들조차 기꺼이 희생 제물로 드리고자 하는 것 속에서 드러난다(17~18절). 19절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20~22절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손자인 야곱, 증손자인 요셉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어지는 내용은 모세와 출애굽 세대의 사람들이다. 11장에서 모세는 두드러진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많은 유사한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왕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즐거워하였다. 여기서 ‘고난 받는다’는 말은 ‘쉰카쿠케오(συγκακουχέω)’로 신약성경에 한 번 나온다. 단순한 형태인 ‘카쿠케오(κακουχέω)는 11:37절과 13:3절에 나오는데, 죽음과 박해의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모세는 순교자와 유사한 역할을 감당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고난당하기를 즐거워함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잠간의 지나가는 즐거움과 영원한 상급 사이의 대조는 순교자적인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 설교자는 이러한 모세의 선택은 보이는 자를 무서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모세의 믿음의 선택은 권면의 내용으로 제시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참으신 내용과 잘 일치하며, 또한 13:13절에서 그리스도의 치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갈 것을 요구받는 독자들의 상황과도 잘 연결된다. 이러한 권면은 또한 이전에 그리스도께 헌신함으로 청중들이 겪었던 수치스러운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10:33).
절별 주해
17~19절 : 이삭을 드린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은 11장의 첫 모범에서처럼(4절) 제사를 드리는 행위 속에서 이루어진다. 히브리서는 여기서 창세기 22:1-8절에 나오는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드라마틱한 사건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받은 유일한 아들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를 제물로 드렸다. 8~12절의 ‘약속들’의 주제가 17절에서 다시 등장한다. 약속의 내용과 그 약속에 있어서 이삭의 중요성은 창세기 21:12절의 칠십인경 인용을 통해 제시된다. 10~11절에서 했던 것처럼, 히브리서 저자는 19절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기꺼이 제물로 드리도록 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킬 분으로 생각했다. 창세기 사건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제물로 드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능히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수많은 후손이 주어짐으로(12절) 구체적인 결과를 얻었는데, 19절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찰을 통해 추론함으로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도로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유는 부활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뿐만 아니라, 죽음 직전에 구출된 이삭처럼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상징을 담고 있다.
20~22절 : 이삭, 야곱, 요셉
아브라함에게 다시 주어진 아들인 이삭은 20절에서 믿음의 인물로 제시된다. 창세기 27:27~40절의 사건에 근거하여 설명하는데,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는 창세기 사건의 실제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 구절에서는 이삭이 어떤 축복을 했는지도 말하고 있지 않고, 단지 그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페리 멜론톤 περὶ μελλόντων)’ 축복했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이것은 앞으로 올 구원을 의미하는 중요한 표현이다(1:14; 2:5; 6:5; 9:11; 10:1; 13:14). 이삭의 축복의 미래적인 전망은 이삭의 구출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기에 20~22절은 17~19절과 단절되지 않고 잘 연결되어진다. 21절에서도 축복의 모티프가 이어진다. 야곱은 임종의 순간에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했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예배했다. 실제로 야곱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한 것이 바로 예배였다. 이것은 다른 족장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근거였고(6, 10, 11, 19절), 마지막 장에 나오는 믿음의 표현으로서의 예배에 대한 권면과도 잘 연결된다(13:15). 족장들의 믿음에 대한 고찰은 요셉의 죽음과 더불어 결론되어진다. 요셉은 임종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확신했으며 그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을 부탁하였다. 17~22절에 자주 등장한 죽음의 모티프가 요셉의 경우를 통해 더 분명하게 제시된다. 믿음으로 요셉은 미래를 내다보았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바라보았던 것보다 더 나은 것을 계획하고 계셨다(40절).
23절 : 모세의 출생
모세의 예는 하나님의 대적들의 무서운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킨 많은 사람들의 긴 명단의 시초로 제시된다. 신앙에 대한 반대는 단순한 반대의 차원을 넘어 적개심으로 나타난다. 11장 후반부는 불신자들의 적개심을 견디라고 격려하는 다음 장(12:1-11)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모세의 생애로부터 발췌한 몇 가지 믿음의 사례 중 첫 번째는 23절에 나오는 그가 출생했을 때의 모세의 부모의 반응이다.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라는 말은 단순히 모세가 용모가 뛰어났기에 그를 숨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든 남자 아이는 죽이라는 바로의 말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적절한 믿음의 모습이다. 그러나 믿음은 적대적인 세력 앞에서 두려워하며 위축되는 것과는 양립될 수 없고, 실제로 믿음은 담대함을 가지게 한다.
24~27절 :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세가 장성했을 때 아브라함이 땅의 고향이 주는 안전함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따랐던 것과 유사한 행동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었다.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그가 누릴 수 있는 지위를 거절하였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25절에서 설명한다. 모세는 잠시 동안 죄가 주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의 삶의 특징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모세는 믿음의 전형적인 예로 제시되고 있다. 잠간 누리는 죄를 거절한 것은 12:2절에 나오는 우리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와 잘 연결된다. 26절은 모세의 거절 뒤에 있는 동기를 설명하는데, 그는 상주심을 바라며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치욕을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평가와 결단이었다.
27~31절 : 출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아브라함이 땅의 고향이 주는 안락함을 버린 것처럼 모세도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 그는 왕보다는 보이지 않는 분을 믿음으로 보며 참았다. 모세의 마지막 믿음의 예는 제사인데, 그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 29절부터 주어가 ‘그들’로 바뀐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걸어서 건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을 환대하여 여리고성의 순종하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달리 구원을 받았다.
본문주해 히11:32~40
본문개관
이 단락은 지금까지 믿음의 인물들에 대해서 다룰 때 사용했던 형식과 스타일과는 다르게 적고 있다. 이전에는 ‘믿음으로(피스테이 πίστει)’라는 말로 믿음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는 ‘믿음을 통하여(디아 피스테오스 διὰ πίστεως)’로 바뀌어 사용되는데, 이 단락의 처음과 끝에 사용되어져서 수미상관구조를 이룬다.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믿음으로’라고 번역함으로 이 변화를 번역에서 잘 살리지는 못하고 있다. 33절과 39절의 ‘믿음으로’는 ‘믿음을 통하여’로 바꾸는 것이 좋다. 이 단락에서는 믿음의 인물들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세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가나안 정복 후의 이스라엘 역사로부터 여섯 명을 언급한다(32절). 이어지는 구절들은 주제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소 단락, 즉 33-34절, 35-36절, 그리고 37-38절로 나눌 수 있다. 앞의 단락에서 믿음의 인물들의 목록에 여성이요, 이방인이요, 부정한 자였던 라합에 대한 언급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원래 이스라엘 공동체 밖에 있던 사람이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옛 언약 하에 있는 백성들의 경계를 넓히는데 관심이 있고, 오히려 라합을 통해 믿음의 인물들이 걸어온 길의 일부로서, 믿음에 바탕을 둔 인물들의 행동은 가족과 민족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이전의 믿음의 사람들의 예를 한 번 더 확증하여 제시하고 있다. 모든 믿음의 영웅들은 이 세상에서는 아웃사이더였다. 그들은 그들의 세대로부터, 그들이 나라로부터 그들이 속한 세계로부터 분리된 자들이었다. 11:33~38절에 언급된 에피소드들은 이와 같은 주제와 잘 부합된다. 특히 37~38절의 내용은 죽음과 박해의 주제로 연결된다. 성도들은 환란과 학대를 당한 희생양들이었다. 이런 자들을 세상은 가치있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어떨까? 히 11장을 이해하는 열쇠는 39~40절에 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믿음 장의 절반밖에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절별 주해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절별 주해
32절 : 여섯 명의 사람들과 선지자들
이 구절에서 지금까지의 패턴인 개별적인 믿음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약속의 땅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여섯 명, 즉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과 사무엘과 선지자들을 언급한다. 이들의 면면도 믿음의 내용으로 꽉 채워 설명할 수 있을 것이지만, 히브리서 설교자는 시간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힌다. 히브리서의 설교자와 관련해서 다양한 제시들이 있었다. 바울, 누가, 실라, 로마의 클레멘트, 아볼로 등등. 독일학자인 아돌프 폰 하르낙은 여성인 브리스길라를 들었다. 그런데 오늘 이 구절이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해준다. 이 구절에 나오는 ‘말하려면(디에구메논 διηγούμενον)’는 남성 단수 분사다. 히브리서에서 유일하게 일인칭 ‘나’와 관계되어 사용된 분사다. 그런데 그것이 남성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히브리서의 저자는 남자였을 것이다.
33~34절 : 믿음과 승리
이 두 구절은 세 그룹의 믿음의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믿음을 통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다. 다윗을 비롯하여 사사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겼다. ‘의를 행했다’는 표현은 특별히 다윗의 공의로운 통치를 말하는 것 같다. 다윗은 물론 바락과 기드온과 같은 사사들은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이런 측면에서 그들은 약속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그룹은 구원행위를 언급하는 세 개의 아오리스트 동사(사자의 입을 막았다; 불의 세력을 멸했다; 칼날을 피했다)로 묘사된다. 삼손과 다윗도 사자의 입을 막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다니엘을 암시하는 것 같다. 불의 세력을 멸한 것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암시하는 것 같다. ‘칼날을 피했다’는 구원을 말하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대적자들로부터 건짐을 받은 많은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는데, 엘리야, 엘리사 다윗과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 그룹은 ‘연약한데서 강하게 된’이라는 표현에서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은 히스기야 왕을 생각할 수 있다. 많은 사사들, 왕들과 지도자들이 이방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35~36절 : 더 좋은 부활
먼저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은 여인들’은 사르밧의 과부와 수넴 여인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부활에 대한 언급은 17~19절에서 이삭이 상징적으로 살아났다는 내용과도 잘 연결된다. 앞에서 점령하고 승리하는 믿음 사람들의 예들이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고난에 대해서 다룬다. 어떤 이들은 심한 고문을 받을 때 더 좋은 부활을 바라며 구차하게 풀려나고자 하지 않았다. 이 언급은 아마 마카비 시대의 순교자, 엘르아살이 돼지고기를 먹기를 거부하다가 죽은 것과 연관될 수도 있다. 또한 마카비 시대의 많은 순교자들이 조롱과 채찍을 당했고, 예레미야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당했다.
37~38절 : 믿음과 세상
간결하지만 생생한 고난의 모습들이 제시되고 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대하24:21; 마23:35)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돌에 맞았다. 전설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애굽에서 돌에 맞았다. 이사야는 전설에 따르면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 시험과 칼에 의해 죽임은 선지자들의 공통된 운명을 묘사하는 것 같다. 양과 염소의 가죽은 먼저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외투를 연상케 하는데, 박해를 피해 엘리야가 도망하는 것을 ‘유리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외에도 궁핍, 환란, 학대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 38절의 설명적인 진술로 인해 고난의 목록은 잠간 중단된다. 우리말 개역개정에서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번역을 했는데 원문의 의미는 이것과는 좀 다르다. 원문은 이렇다: 혼 우크 엔 악시오스 호 코스모스 ὧν οὐκ ἦν ἄξιος ὁ κόσμος. 번역하면, “그들에게 세상은 가치가 없었다”가 된다. 이 말은 많은 순교자들과 선지자들이 고난을 감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많은 선지자들이 광야, 산, 동굴과 토굴에서 유리하였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리는 믿음의 인물들의 모습은 교회들에서 말하는 믿음의 내용과는 많이 다르다. 불가능도 믿음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주제보다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고 더 나은 상급을 바라고 이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이 세상에서 분리된 자로,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산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39~40절 : 더 좋은 것
이 믿음의 인물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는 받았다. 하나님의 인정은 받았다. 그러나 약속(에팡겔리아 ἐπαγγελία)을 받지는 못했다. 이 표현은 13절에서 언급된 내용을 반복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13절에서는 복수형을 쓰고 39절에서는 단수 형태를 쓴다. 복수형으로 사용하여 ‘약속들’이라고 할 때는 구약의 인물들과 관련된다(6:11, 15; 7:6; 11:9, 17, 33). 반면에 단수 형태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궁극적인 약속을 말한다(6:17; 9:15; 10:36). 구약의 믿음의 인물들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예시해 주었고, 최종적인 목표를 가리키는 역할을 했다.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이 궁극적인 약속을 얻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약의 성도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심의 결과다.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40절에서 알 수 있다. 약속을 이루는 것은 온전함을 이루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온전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양심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기에 구약의 성도들의 온전함은 신약의 성도들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구약의 성도들은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계획을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이해는 더 나은 것이 가능하도록 하신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을 절실히 고대하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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