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주해 (10)
1. 본문주해(히10:1~10)
본문개관
1~10절에서 하늘/땅의 대조에서 다시 땅의 축으로 돌아온다. 예배하는 자들을 온전하게 할 수 없는 율법의 부적절성(1절), 구약의 속죄 제사들의 효력이 없음(2절)과 죄를 사하는데 있어서 황소와 염소의 피의 불가능성(4절)에 대해서 확실히 지적한다. 이 단락에서는 단지 그림자에 불과한 율법과 장차 올 좋은 것에 대한 언급을 통해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대조들이 혼재한다. 그리스도의 제사가 동물제사와 다른 점을 뚜렷이 설명하기 위해 시편 40:7~9절을 인용하고 이어서 해석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5절에 등장하는 시편 40편은 ‘나를 위하여 듣는 귀를 파다’의 맛소라 본문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몸을 준비했다’의 칠십인경으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둘째는 하늘/땅과 영/육의 대립이 초월적인 영역에서 발생한 어떤 사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몸의 행위에 의해서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율법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려진 순종의 제사(7절) 사이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이 순종의 제사는 신약의 다른 부분인 로마서 12:1절과도 잘 부합되는데, 순종의 제사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을 통해 가능했다. 이 순종의 제사는 이전의 동물제사와는 차별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은 이전의 동물제사로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양심과 마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에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을 통해 예레미야 31장에서 약속했던 영적인 정결과 내적인 갱신이 가능하게 되었다. 8~10절의 해석 부분에서 ‘율법을 따르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대조된다. 외적인 제의적인 행동들과 내적인 순종 사이의 대조를 통해 외적인 제사를 요구하는 제의 체계는 폐지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새로운 원칙이 세워졌음을 천명하고 있다(9절).
절별 주해
1절 : 장차 올 것의 그림자
매년 계속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는 필연성은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접근을 제공하지 못하는 율법이 규정한 희생제사의 비충족성을 의미한다. 레위 제사장은 천상의 성소의 모형과 그림자에 해당하는 성소를 섬기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제 그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스키아 σκιά)일 뿐이다. ‘스키아’는 불완전이나 미완성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것을 통해 율법의 기능은 완전한 것을 가리키는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장의 구성은 스키아와 에이콘(εἰκών)의 예리한 대조를 요한다. ‘에이콘’은 ‘구현’ 또는 ‘실제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차 올 좋은 일’과 ‘참 형상’은 새 시대의 차별적인 부분을 담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묘사한 9:11절을 연상시킨다. 옛 언약 하에서 드려졌던 제사의 한계가 분명히 언급되었는데,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속죄일에 드린 제사가 효력을 가지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지적하고 있다.
2~3절 : 반복되는 제사
옛 언약의 제사들의 약점을 예배자의 경험과 관련시켜 설명한다. 만약 제사드리는 자들이 제사를 통해 죄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어 죄사함의 경험을 했더라면 제사드리는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 반복적인 제사가 드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드려지는 제사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게 하는 기능을 했다. 대속죄일은 금식(레23:26-32)과 죄고백의 날(레16:20-22)로 지칭되었는데, 자신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반복되는 제사는 죄의식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과 관련해서 죄의식이 남아있는 한 하나님께 대한 섬김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양심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의 필수요건이었고(10:22),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9:14).
4절 : 동물제사와 죄
1절에서 옛 언약 제사의 한계를 설명하며 온전하게 ‘할 수 없다(우데포테 뒤나타이 οὐδέποτε δύναται)’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4절에서도 ‘할 수 없다(아뒤나톤 ἀδύνατον)’는 표현을 쓴다. 다르게 표현하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이 ‘it is impossible’로 번역한다. 황소와 염소의 피로 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이 구절에서 옛 언약 제사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이것은 7:11, 19; 8:7, 13; 10:1절에서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9:13절에서 옛 제사의 효력이 육체를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그려지지만, 실제적인 관심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온전함, 즉 양심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에 동물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5~7절 : 시편 40:6~8절 인용
5~10절에서는 옛 언약의 비효율적인 희생제사가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충분한 희생제사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설명한다. 5~7절에서 시편 40:6~8절을 인용하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백적으로 말씀하시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세상에 임하실 때에’와 ‘행하러 왔나이다’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의미한다. 시편 인용을 통해서 강조되는 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수동적인 참여가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이다.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제사, 즉 자기의 몸을 드리시는 그리스도의 결단이 드러나 있다. 이 단락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사가 동물제사와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 것은 마음으로부터의 헌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8~10절 :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제사
율법을 따라 드리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심을 알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 몸을 제사로 드리셨다. 이렇게 드려진 제사는 그의 백성들이 거룩함을 얻게 했다. 여기서 희생 제사에 대한 네 가지 다른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 하에서 드려지는 모든 제의에 대해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린 그리스도의 제사는 옛 언약의 모든 제사를 폐하시고 새 언약의 제의를 세우셨다. 시편 40:4~6절의 성취는 새로운 질서를 세웠다. 시편의 인용문과 그리스도 사건은 옛 질서가 명확하게 폐기되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그리스도가 순종으로 드린 제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한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룩을 선물로 주었다. 이것은 2:11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로 묘사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가 그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과 유대관계 가운데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기 때문이다(2:14). 동물제사의 비효율적인 것과 효과적인 희생으로 드려진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드림을 대조하고 있다.
2. 본문주해(히10:11~18)
본문개관
1~18절은 4 부분으로 된 교차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내용은 새 언약에 근거한 이 땅에서의 제사(1-10절)과 그리스도의 제사의 결과(11-18절)에 대해서 다룬다.
A 반복되는 제사를 규정하는 율법조항의 부적절성(1~4절)
B 반복되는 제사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로 대체함 (5~10절)
B' 레위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유일한 제사장이 대체함(11~14절)
A' 더 이상의 제사를 필요치 않는 새 언약의 규정들의 적절성(15-18절)
11~18절은 이전 단락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을 반복함으로서 이어지는 권면(22~25)을 위한 발판을 제공한다. 위의 교차대칭구조에서 드러난 것처럼 11~14절은 옛 제사들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한 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대체되었음과 15~18절은 그리스도의 제사가 죄를 효과적으로 제거했음을 지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죄가 효과적으로 제거되었음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 모습은 2절에서 옛 성소에서 섬기던 자들이 끊임없이 제사를 드리는 모습과 대조된다. 16~17절에서 예레미야 31장을 다시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새기실 법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이 법은 대체되어진 옛 육체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구현된 자발적인 순종의 법이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하는 삶의 기준이 된다.
절별 주해
11절 : 제사장들의 무능함
1절과 11절은 유사한 단어를 사용하여 이 땅의 제사장들의 무능함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와 옛 언약의 제사장들 사이의 대조는 대표적으로 대제사장을 들어 대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제사장들의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고 대제사장은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매일 드리는 제사뿐만 아니라 대제사장까지 포함하는 지상의 모든 제사장들의 직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땅의 제사장들이 제사의 직분을 감당할 때 서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앉아계신다. 그들은 이 땅의 제단에서 섬기는 일을 할 때, 완전하지 못한 제사를 드린다. ‘자주 드린다’는 것은 9:25~26절과 10:1~2절에서 반복된 제사에 대한 무효함을 지적했던 내용을 연상시킨다. 해마다 그리고 매일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거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였다. 이 구절은 10:1~4절의 논증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여 다시 진술한다. 옛 제사장들은 모든 노력과 수고로 제사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제거하지 못하였다.
12~14절 : 영원한 제사
이 구절에서 지상의 제사장과 천상의 제사장 사이의 더 분명한 대조가 이루어진다. 레위 제사장들은 여러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서 있지만, 그리스도는 한 제사를 드렸다. ‘드렸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프로세넹카스(προσενέγκας)’인데 부정과거 분사형태다.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하여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과거에 있었고 완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의 제사는 오랜 기간을 통하여 행해져온 수많은 희생 제사가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는 죄를 제거함으로 인간을 거룩하게 하였다. 그의 제사의 효력은 영원하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으로 묘사함으로 그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거룩하게 된 자들을 단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였다. ‘온전하게 하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테텔레이오켄(τετελείωκεν)’으로 완료시제로 사용되어 그의 사역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동사의 시제는 ‘영원히(에이스 토 디에네케스 εἰς τὸ διηνεκὲς)’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거룩하게 된 그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반면에(9:28; 10:25), 그리스도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등상이 될 때를 기다리신다. 이러한 그림은 그리스도의 주권의 완성과 9:28절에 소개된 재림을 생각나게 하고, 이후에 이어질 종말론적인 전망과 잘 연결되고 있다(10:25, 30~31, 37~38; 12;27). 이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이미지가 다스리는 자의 이미지로 바뀐 것이 아니라, 갈보리에서 드려진 그의 제사는 완성되었고,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사역은 끝이 났고,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안식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15~17절 : 성령의 증언
이 구절에서는 예레미야 31:33~34절을 인용함으로 새 언약은 영원하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완전하고 최종적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예레미야 31장은 8:8~12절에서는 길게 인용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의 구약인용은 별 다른 내용을 담지 못한 단순 반복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8:8~12절에서는 옛 언약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예레미야 31:31~34절을 길게 인용하였지만, 이 구절에서는 두 구절만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도 다른 히브리서 구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증언으로 두 가지 교훈을 환기시킨다. 먼저는 하나님은 자신의 법을 백성들의 마음과 생각에 새기셨다. 이 사실을 들으며 8장에서와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것처럼(10:7, 9), 외적인 강요가 아닌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은 것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옛 언약 하에서 드려졌던 제사는 이전에 지은 죄를 기억나게 했지만(10:3),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용서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가 하나님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18절 : 다른 제사의 불필요성
앞의 구절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더 이상 다른 죄를 위한 제사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도 제사의 완전성과 영원성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를 통해 양심이 새롭게 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성도들은 그 구원의 은혜를 더 이상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단번에 완전한 제사가 드려진 이후에, 또 그 은혜를 맛보고 나서 고의적인 죄를 지속적으로 범하게 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10:26).
3. 본문주해(히10:19~31)
본문개관
이 단락은 8:1~10:18절의 신학적인 논증에 근거해서 권면을 하는 부분이다. 그러기에 이 단락의 시작은 ‘그러므로(οὖν)’라는 접속사로 시작함으로 지금까지의 전체 논의를 종합한다. 19~21절은 앞의 논의를 압축적으로 결론짓고, 22~25절은 그것에 근거한 권면을 하고 있다. 26~31절은 6:4~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엄한 경고를 담고 있다. 특히 19~25절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감의 주제가 중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설명할 때 두드러진 것으로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동생들을 천사들보다 뛰어난 영광으로 인도한다(2:10). 그는 하늘들(4:14), 하늘 성소(9:11), 성소로(9:12, 24)로 들어가셨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묘사는 성도들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성도들도 예배와 기도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보좌로(4:16; 10:22) 나아가고,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고(4:11),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6:1절, 우리말 번역에서는 6:2)고 권면한다. 하나님께 나아감 외에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10장 이후로 이 움직임의 방향은 바뀐다. 이 변화는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거룩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10:22)은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13:13). 영문 밖에 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감사와 선행이다(13:15-16). 청중들을 향한 영문 밖으로의 부름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저 세상으로의 부름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의 부름이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13:1), 손님 대접(13:2), 갇힌 자를 생각하는 것(13:3), 결혼을 귀히 여기는 것(13:4), 돈을 사랑하지 않고(13:5), 믿음의 선배의 모습을 본받는 것(13:7)이다. 이러한 권면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치욕을 견디신 것(12:3)처럼 그들도 이 땅의 가치관에 매몰되지 말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가치관을 품고 이 땅에서 치욕을 당하며 살라는 것이다(13:13).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의 삶에서 바로 선을 행하고 찬양과 감사로 사는 것이다(13:15-16).
절별 주해
19-21절 : 성도들이 가진 것
원문에서 ‘가지고 있다(에콘테스 ἔχοντες)’는 분사는 두 개의 목적어를 가지는데, 하나는 ‘담력(파레시아 παρρησία),’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늘 성소에 들어갈 담력이요(19절),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다스리는 ‘위대한 제사장(21절; 히에라 메간 ἱερέα μέγαν)’이다. 담대하고 자유롭게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옛 언약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제사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 하늘 성소로 나아가는 것은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새로운 살 길’로 규정된다. 휘장은 제사장들이 이 땅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으로 이제는 찢어지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것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이라는 의미는 옛 언약 하에서는 불가능했던 것으로 이것이 ‘최근에 열리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또한 새 언약이 옛 언약과 비교할 때 질적으로 완전히 새롭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그 길은 ‘살 길’인데, 이 말은 성도들이 멸망하지 않는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즉 새로운 생명의 삶의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2-25절 : 세 개의 권면
이 단락은 세 개의 청유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자(프로세르코메사 προσερχώμεθα, 22절), 굳게 잡자(카테코멘 κατέχωμεν, 23절), 서로 돌아보자(카타노오멘 κατανοῶμεν, 24절). 22절에서 마음과 양심이 깨끗해져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아가자(προσερχώμεθα)’는 동사는 히브리서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다(4:16; 7:25; 10:1,22; 11:6; 12:18~24). 문맥을 고려해 보면 이 단어는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기도와 예배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몇 가지 단서가 있다. 먼저는 설교자는 25절에서 공동체적인 예배를 격려한다. 둘째는 기도의 중요성이 5:7절에서 언급되는데 이것은 4:16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셋째는 12:22~24절은 이 땅에서의 예배자와 천상에서의 예배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넷째는 9:14절과 12:28절에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양심을 깨끗케 하시는 목적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22~25절에서의 권면은 기독교 공동체의 안정을 목표로 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을까? 먼저는 공동체적인 돌봄, 사랑과 선행을 통해서다(24절). 둘째는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함을 통해서다(25절). 셋째는 위로, 격려와 경고를 통해서다. 22~24절에서 각각의 동사들은 기독교인의 믿음, 소망, 사랑의 삼중적인 덕을 설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온전한 믿음(22절), 믿는 도리의 소망(23절), 사랑(24절). 이 주제는 이어지는 장에서 분명하게 다루어진다. 11장은 믿음을, 12장은 소망을, 13장은 사랑을 다루고 있다.
26~27절 : 모세 법과 심판
이 구절에서 다시 한 번 배교의 큰 죄에 대해서 경고한다. 6:4~8절보다 더 강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성도들은 어떤 죄라도 피해야 한다. 그런데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같다. 부지중에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중보의 사역을 하실 것이다(2:18; 4:14~16). 그러나 개종을 의미하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딤전2:4; 4:3; 딤후2:25; 3:7)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배교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나(9:28; 10:25), 배교자들은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릴 뿐이다. 이 심판에서는 대적하는 자를 맹렬히 태울 것이다(사26:11). 이것은 더 나은 구원 메시지를 받은 자가 불복종하게 될 때 받게 되는 응당한 보응이다(2:1~3).
28~29절 : 하물며
이 구절에서는 히브리서에서 자주 등장한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논증이 등장한다. 모세의 법을 폐한 경우에도 두 세 증인이 증거를 통해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모든 죄에 해당한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경우였다. 알면서 하나님을 향해 방자히 행하는 자도 이스라엘로부터 근절되었다. 구약의 계명도 고의적으로 거부하면 보응을 받았다면, 새 언약을 통해 주어진 구원과 권면을 거부하면 어떤 결과가 있겠냐고 논증한다. 새 언약 하에서 거부하는 행위를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하고 성령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게 되면 그가 당할 형벌은 더 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곰곰이 생각하라고 한다.
30~31절 : 심판하시는 하나님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지만 배교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자비와 은혜가 아니라, 심판과 진노로 대하신다. 인간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전능자가 원수를 갚으려고 하신다면 그것이야 말로 불행한 인생이라는 것이다(신32:35).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여기서 ‘무서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베로스(φοβερός)’인데 신약에서는 히브리서에서만 사용되었다(10:27, 31; 12:21).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도 나오는 표현인데(삼하24:14),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을 긍정적으로 그린다. 그러나 여기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며(12:29), 죄인들의 죄를 경히 여기지 아니하는 분이시다.
4. 본문주해(히10:32~39)
본문개관
26~31절에서 엄한 경고를 한 후에 히브리서 저자는 6장에서 했던 것처럼 이전에 성도들이 보여주었던 믿음의 행동을 상기시킨다. 정확히 어떤 박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뎌내었고, 비방과 환란으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도 견디었고, 그런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돕고 위로하였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그들이 재산을 빼앗기는 어려움을 잘 견뎌낸 행동의 이면에는 ‘더 낫고 영원한 소유’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언급한다(이 '더 낫고 영원한 소유'는 이어지는 믿음 장에서 많은 선진들의 확신에 찬 믿음의 행동의 바탕이 되었다). 설교자는 그러므로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권면한다.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용기, 인내와 물러서지 않음이다. 특히 이 단락에서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단어들이나 표현을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단어와 표현을 통해 청중들이 집중해서 듣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2절에서 ‘큰 싸움’을 의미하는 ‘아들레시스(ἄθλησις)’가 사용되었는데, 신약성경에서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다. 33절에서는 ‘때때로 ... 또 다른 경우에는’으로 번역된 ‘투토 멘 ... 투토 데(τοῦτο μέν ... τοῦτο δέ)’가 등장하는데, 이것도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비방’을 의미하는 ‘오네이디스모스(ὀνειδισμός)’는 11:26; 13:13절에, 그리고 히브리서를 제외하면 로마서 15:3절과 디모데전서 3:7절에 나온다. ‘구경거리가 되다’는 의미의 ‘데아트리조(θεατρίζω)’는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34절에서는 ‘빼앗기는 것’이란 의미의 ‘하르파게(ἁρπαγή)’는 마23:25절과 눅11:39절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소유’를 의미하는 ‘휘파륵시스(ὕπαρξις)’는 행2:35절에서만 사용되었다. 35절에서는 ‘상’으로 번역된 ‘미스다포도시아(μισθαποδοσία)’는 2:2절과 11:26절에만 나온다. 37절의 ‘잠시 잠간 후면’이란 표현도 신약성경 다른 곳에는 없고, 38절의 ‘뒤로 물러가다’는 단어는 행 20:20, 27절과 갈2:12절에만 사용되었다. 39절의 ‘뒤로 물러가는 자’는 신약성경 다른 곳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절별 주해
32절 : 과거의 믿음의 행위
이 구절은 역접 접속사 ‘데(δέ)’로 시작한다. 앞의 단락에서 엄한 경고를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수사학적인 기법은 엄한 경고 후에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로 시작하는 6:9절의 경우와 유사하다. 6장을 주해할 대도 말한 것처럼 과거의 선한 행위들을 언급하며 경고 받을 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를 붙잡기(capturing the goodwill)를 기대하는 것이다.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새 힘을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구절에서는 배교의 위험에 처해 있는 성도들에게 과거에 그들이 한 선한 일에 대해 생각하라고 한다. 그들은 개종하여 세례를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사움을 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한다.
33-34절 : 고난의 양상들
‘투토 멘 ... 투토 데(때대로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구문을 통해 과거의 모욕과 조롱에 대해서 말한다. 때론 비방과 환란으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을 모른 체하지 않고 돌보았다. 회중들이 당한 고난은 앞에서 언급한 단어인 ‘데아트리조’와 관련이 있다.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마치 극장에서 사람의 관람대상이 된 것과 같은 공개적인 조롱을 받았다. 그들은 주님을 섬기듯이 갇힌 자들을 살피고 재산이 몰수되는 것도 기쁨으로 감당하였다.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더 낫고 영구한 소유,’ 히브리서에 나오는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보면 ‘더 나은 본향’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3:11; 11:16). 이 구절들은 공동체가 겪었던 과거의 실제적인 시련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것이 어떤 전국적인 박해나 국지적인 박해였는지는 알 수 없다.
35절 :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32~34절에 근거해서 권면을 한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접속사 ‘운(οὖν)‘이 이 구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권면한다. 공동체는 그들의 과거의 신앙의 특징이었던 열정을 이제 다시 붙잡아야 한다. 과거에 그리스도에게 보여 드렸던 끊임없는 헌신을 현재에도 보여주어야 한다. 이 절에 나타나는 ‘담대함(파레시아 παρρησία)’이란 단어는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확신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에서 매우 여러 번 그리고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담대함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4:16; 7:24-25; 10:19, 21). 또한 담대함을 견고하게 붙잡으라는 권면도 있었다(3:6). 담대함은 새 시대에 하나님의 집, 즉 백성 된 사람들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큰 상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 단어는 ‘보응’이나 ‘벌’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2:2), 상의 의미로 긍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11:26). 상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11:6).
36절 : 인내가 필요함
공동체에게 인내(휘포모네 ὑπομονή)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한 것을 받기 위함이다. 인내는 담대함처럼 성도의 표지다. 12:1~13절에서는 십자가와 죄인들의 거역을 참아내신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며, 성도들도 고난과 훈련의 고통을 잘 참아낼 것을 권면한다. 이 절에서 말하는 약속은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의 최종목표다(11:39~40).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기업, 즉 영생이다(9:15).
37~38절 : 하박국 인용
인내를 해야 하는 이유가 이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박국 2:3~4절을 인용하며 약속과 경고를 동시에 하고 있다. 경고는 뒤로 물러가지 말고 신실함을 유지하라는 것이고,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곧 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간 후면 오시기로 하신 분이 오실 것인데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하박국 2;3절의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임박한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자에 대한 심판이었는데, 칠십인경에서는 ‘오실 이’로 바뀌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칠십인경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하박국서의 인용 중 ‘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사도 바울에게도 두 번 인용되었다(갈3:11; 롬1:17). 바울에게서는 믿음이 강조되었고, 히브리서에서는 인내와 신실함에 대한 권면으로 사용되었다.
39절 :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
이 절에서는 ‘너희’가 ‘우리’로 바뀐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보여주는 신실한 사람들로 저저와 성도들을 포함한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하박국서를 인용하면서 가졌던 칭의의 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타락의 위험성이 있는 청중들에게 엄한 경고와 약속을 함께 제시했던 설교자는 이 구절에서 긍정적인 진술로 끝맺는다. 독자들은 뒤로 물러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처할 사람들이 아니요, 믿음을 통해 영혼을 보존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두 길,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과 생명의 길 외에는 다른 길을 제시하지 않으며, 독자들이 멸망이 아닌 생명의 길에 있기를 바라고 있다. 여기서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믿음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11장에서 잘 밝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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