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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12_히브리서12장 주해)
김영권 2016-06-01 추천 0 댓글 0 조회 1401

 

히브리서 주해 (12)

 

 

1. 본문주해(12:1~13)

 

본문개관

이 단락은 앞의 단락과 독립된 별개의 단락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믿음장인 11장을 살펴보면서 두드러진 것은 믿음으로 불가능도 가능으로 바뀌는 것에 대해서도 다루지만, 11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두드러졌던 것처럼 핍박과 인내와 같은 요소가 믿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1장의 믿음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믿음의 조상들의 본을 따르게 하는 것도 하나의 의도였을 수 있지만, 11:39~40절을 통해서 히브리서 설교자가 보여주는 것은 새 언약 백성의 우월한 특권이다. 믿음으로 잘 인내한 과거의 사람들은 새 언약 백성들을 통해 온전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에 이어서 그리스도는 믿음이 시작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분으로 제시된다. 새 언약 백성들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 궁극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떠한가? 그리스도도 고난과 인내를 통해 우리 믿음의 경주의 완전한 모델이 되셨다. 그러기에 그분을 바라보며 새 언약 백성인 우리도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달려야 한다. 옛 언약의 믿음의 조상들은 마치 관중석에서 새 언약 백성인 우리의 경주를 격려하고 박수치는 자들로 묘사된다. 새 언약 백성들이 믿음의 릴레이 경주의 마지막 주자인 것처럼 그려진다. 새 언약 백성들이 결승점을 잘 통과해야 이전에 옛 언약 하에서 믿음의 경주를 했던 사람들도 그들의 경주가 완성될 수 있다. 12:1~13절은 히브리서의 구조 안에서는 인내가 있는 믿음을 말하는 10:36~39절과도 잘 연결된다. 이 단락에서는 인내에 대한 촉구를 하고 있는데, 1~3절은 앞 장의 내용들을 요약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4~6절은 잠언 3:11~12절을 인용하고, 7~11절에서는 그 인용에 근거해서 중요한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다. 12~13절에서는 다시 운동 경기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권면한다. 큰 구조에서 보면 10:36~12:13절은 믿음과 인내라는 주제로 잘 연결된다.

절별 주해

1: 우리 앞에 당한 경주

히브리서는 새 언약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이번에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구름과 같이 둘러싼 증인들이다. 그들은 11:2, 4, 5, 39절에서 증거를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인내를 통해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 증인들이다.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을 거부함으로 자발적으로 외인이 되고 아웃사이더가 된 그들처럼, 히브리서의 청중들은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함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었다(2:5~18; 5:5~10; 10:5~10).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 온전함을 이루셨다. 그러기에 그는 인내와 믿음에 있어서 우리의 완전한 모델이 되신다. 2절에서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전치사가 안티(ντ)’. 이 전치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위하여. 우리말 번역이 이 의미를 취했다. 그런데 다른 의미는 ‘~대신에. 만약 이렇게 번역을 하면,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 대신에 십자가를 참으사가 된다. 둘 다 가능하다. 후자를 취하면 앞의 25절에 묘사된 모세의 경우와 잘 어울린다. 그런데 ‘~위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적절해 보인다.

 

4~6: 아버지의 징계

믿음과 인내에 대해서 다루었던 히브리서 설교자는 12:4~13절에서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교육하고 징계하는 도구라는 주제와 더불어 새로운 전환점을 이룬다. 4절은 운동경기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청중들이 과거에 박해를 당하는 상황에서 대항하여 싸운 것을 상기시킨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운동 경기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 자들로 그려지기 보다는 복싱이나 레슬링과 같은 전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죄와의 싸움을 묘사할 때 사용된 헬라어 단어 안타고니조메노이(ἀνταγωνιζμενοι)는 신약성경에는 한 번 나오는 단어로 다른 문헌에서는 순교와 관련해서 사용되기도 했다. 여기서 싸움의 대적은 죄인데, 이전 단락에서는 경주자의 걸림돌이었다.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았다는 표현은 온건한 꾸짖음을 담고 있으며, 청중들의 상황이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처럼 수치와 치욕의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목숨을 빼앗기는 순교적 상황은 없었고 비방, 환란, 구경거리, 재산몰수 등과 같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던 것 같다(10:32-34절 참고). 5~6절에서 꾸짖음의 강도가 약간 세진다. 청중을 향하여 성경의 말씀을 잊었다고 지적하며 잠언 3:11-12절의 말씀을 인용한다.

 

7~8: 인내와 징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인내를 징계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잠언 인용에 근거하여 징계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성도를 아들로 묘사한 구절이 2:10절인데, 그 구절을 둘러싸고 있는 단락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예수님의 아들됨(Sonship)도 고난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징계가 버림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마카비26:12~17이나 파일로의 글들, 랍비문헌과 신약성경(고후 6:9; 딤전 1:20; 6:4; 8:19)에도 자주 등장한다. 징계는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설명한다.

 

9~11: 연단과 열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조를 통해 징계라는 측면에서 육신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를 대조하여 그린다. 잠시 자기의 뜻대로 징계를 하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필요한 아들의 반응은 공경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즉 그의 거룩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우리가 보여야 하는 반응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욱 복종하면서 사는 것이다.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상급을 대조하며 징계 받을 당시에는 즐거운 것이 아니지만, 연단 받은 자들은 후에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평강은 히브리서에 있어서 구원의 은유로 사용된 안식과도 잘 연결된다. 이것은 이어지는 14절에서 사람들과의 화평의 권면과도 연결된다. 두 번째로 언급하는 징계의 열매는 . 히브리서에서 의는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고(1:9), 또한 믿음의 결과로 간주되었다 (10:38; 11:7, 33). 의에 대한 언급은 이어져 다루게 될 13:1~5, 17절의 권면과도 연관이 있다.

 

12~13: 강하게 하라

다시 운동경기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그리고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게 하라고 권면한다. 이 묘사를 보면, 이사야 35:2절에 나오는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와 직접적으로 있는 것 같다. 이사야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신원하심을 기대하며 담대하라고 이사야가 촉구한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강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일반적으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지쳐있는 것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13절에서 성경의 암시는 계속된다.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면은 지혜의 길을 따르기를 권고하는 잠언 4;26절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연약하고 지친 상태를 은유적으로 다리를 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길을 곧게 하는 것은 저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심한 장애를 가지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길을 곧게 하여 저는 다리로 어그러지지 않게 하라는 부분은 공동체 중에서 연약한 사람들이 진리를 버리고 배교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권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히브리서 설교자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서 감지한 영적인 무기력과 나태의 상태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운동경기와 의학적인 이미지를 통해 신실하게 믿음으로 인내하라는 권면하고 있는데, 그 어조는 긍정적이고 히브리서의 다른 구절들(6:4-8; 10:26-31)과 비교해 보면 훨씬 부드럽다.

 

2. 본문주해(12:14~29)

 

본문개관

이 단락은 히브리서 구조에서 마지막 권면 단락으로 묶을 수 있는 12:14~13:21절의 시작 부분이다. 이 단락은 카리스(χρις)’15절과 28절에 배열되어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고 있다. 14~17절은 일반적인 경고를 하고 있는데, 특히 세 가지 예를 들어 주의하야 함을 말하고 있다. 18~24절은 히브리서의 중심주제인 하나님께 나아감을 다룬다. 특별히 시내산과 하늘의 시온산을 대조적으로 묘사하는데,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두려움으로 인해 나아갈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말한다. 시내산에서의 광경을 설명할 때 불, 흑암, 폭풍, 큰 소리와 같은 공포를 더해 주는 요소들이 등장한다. 심지어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짐승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산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는 것에 대한 언급은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묘사는 8~10장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오직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하루만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과도 연관이 되어, 옛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두렵고 제한적이었고 차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면에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는 밝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기쁨의 잔치와 모임이 그려지고 있는데,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는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즐겁고 사모할 일임을 대조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하늘 예루살렘의 구성원들은 제한이 없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은혜를 입은 자면 누구든지 나아갈 수 있다. 즐겁고 자유롭게 차별 없이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다. 25~29절에서 이러한 은혜를 입은 새 언약의 백성들은 마땅히 그 은혜를 귀하게 여겨야 함을 강조한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은 자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절별 주해

14~17: 거역함에 대한 경고

히브리서 설교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없이는 주를 아무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일까? 화평함? 아니면 거룩함? 우리말 성경에서는 별다른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서는 명확히 드러난다. 화평(에이레네 ερνη)은 여성명사고, 거룩(하기아스모스 γιασμς)은 남성 명사다. ‘이것은 관계대명사 형태로 주어졌는데, 남성관계대명사 (οὗ)’를 사용하여, ‘후 코리스(οχωρς)’그것이 없이는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선행사는 남성이어야 한다. 앞의 두 단어, 화평함과 거룩 중에서 남성명사는 거룩함이다. 이것을 토대로 풀어쓰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가 된다. 이어서 15~16절에서 누가 ~하지 않도록의 의미를 지닌 메 티스 μτις로 이루어진 3개의 권면을 하고 있다. 주를 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되는 일이 없도록, 마지막으로는 음행하거나 거룩하지 않은 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15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는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지만 이르지 못한 것을 말하는 4:1절을 상기시켜주며 로마서 3:23절도 연상시켜준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성도의 실패의 가능성에 대해서 말한다.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언약을 져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히브리서를 쓰게 된 목적과도 잘 연결된다. 에서의 부정적인 예를 언급하면서 음행하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주석가들을 당황하게 하는 표현인데 왜냐하면 성경에서 에서와 관련해서 음행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후기 유대문헌에서 에서를 성적이고 교활한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창세기 26:34절에 나오는 헷 족속 유딧과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삭과 리브가를 당황스럽게 했던 내용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아마 히브리서 설교자는 이러한 전통에 대해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고 음식 한 그릇에 팔아버리는데, 이것은 장자들의 모임 안에서(12:23) 맏아들이신 예수님(1:6)과의 관계를 잃어버릴 위험에 있는 청중들과 잘 연결이 된다.

 

18~24: 시내산 vs 시온산

이 단락에서는 시내산과 시온산의 대조와 청중들과 출애굽 세대와의 구별이 두드러진다. ‘그들너희 (우리)’로 표현된다. 그들이 다다른 곳은 광야의 백성들이 경험했던 시내산이다. 여기서 시내산은 옛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께 나아감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 볼 것은 새 언약 아래서의 성도들인 우리는 만질 수 있는 어떤 것, 불붙는 산, 어두움, 흑암, 폭풍, 나팔소리, 더 말씀하지 않도록 간구하도록 했던 말하는 소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인격적이지 않은 사물들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광경에 모세도 두렵고 떨린다고 하였다(12:18~21). 22절은 그러나로 시작한다. 반면에 새 언약의 성도들이 이른 곳은 시온산,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 천만 천사,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 (맏아들이신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들), 만민의 심판자 하나님,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다. 여기서 우리말에는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라고 번역을 했는데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κκλησα)’모임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고, ‘모임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파네귀레이(πανηγρει)’인데 기쁨의 모임(festive gather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 단어의 의미를 함께 살려 장자들의 기쁨의 모임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앞의 시내산의 묘사가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반면에, 이어 나오는 시온산의 묘사는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하다.

 

25~29: 은혜를 받자

히브리서 설교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이 구절에서는 땅과 하늘의 대조를 통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조의 방식을 취하는데, 어떤 학자들은 땅에서 말씀하신 이는 모세를 말하고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땅과 하늘에서 말씀하신 분은 동일하게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정당해 보인다. 이 대조는 땅과 하늘에서 말한 자의 대조가 아니라 계시의 방식의 대조인 것 같다. 더 나은 계시를 받은 우리에게 더 많은 책임이 주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26절에서는 학개 2:6절을 인용하며 우주적인 진동에 대해 말한다(1:10-12 참고). 여기서 멸망되지 않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접근가능하게 된 하늘의 실체를 말한다. 낮고 물질적인 창조세계를 제거하고 나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다니엘서나 복음서에 언급된 나라에서와 같이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말한다. 그런데 이 종말론적인 실재를 청중들은 이미 어느 정도 누리고 있다. 이 나라는 이 창조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귀를 통해서 접근 가능케 된 영역이다. 결정적인 우주적인 종말의 사건 아래서 청중들에게 감사할 것은 요구한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은혜로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라고 한다. 이것은 이어져 나오는 13:1~19절의 권면과도 잘 연결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 예배는 믿음에 근거한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증언하는 찬송의 제사와 삶 가운데서 선을 행함과 나눔을 통해 드려지는 삶의 제사다(1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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