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주해 (9)
1. 본문주해(히9:1~10)
본문개관
이 단락에서는 옛 언약 제의의 한계들에 대해서 하늘/땅의 대조를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다. 설교자가 지적하는 한계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땅의 성소의 구조는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의 차별화된 제한성을 드러낸다. 옛 언약 하의 성소는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방 사이에 휘장이 있었다. 이 휘장은 일반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고, 오직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때 통과할 수 있었다. 둘째는 옛 언약 아래에서 드려진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들의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고 말함으로 옛 제의 체계의 부적절성을 말한다. 흠이 많은 대제사장이 불완전한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는 양심과 관련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결케 하거나 깨끗하게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 자신의 연약함과 드리는 제물의 한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적인 문제, 즉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히브리서 설교자는 정결법의 외적인 준수 여부보다는 죄의 내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단락 이전에도 3장과 4장에서 죄의 문제가 언급되었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맛사와 므리바에서 불순종하고 반역했던 광야세대의 잘못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죄는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악하고 믿지 않는 마음과 관련이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와 같은 잘못된 본을 따르지 말 것을 경고했다. 이 단락에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성문 밖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13:12)은 하늘과 땅이 진정으로 만나는 장소로서 하늘/땅의 대조를 극복하고 성도들의 내적인 양심과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말한다.
절별 주해
1~2절 : 성소
1절은 헬라어 원문에서는 접속사 ‘운(οὖν)’이 있다.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따로 번역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now’로 번역하였다.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첫 언약 하의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에 관한 것이다. ‘세상에 속한 성소(토 하기온 코스미콘 τό ἅγιον κοσμικόν)’에서 ‘코스미콘’은 ‘세상의’ 혹은 ‘땅의’라는 말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 단어를 통해 히브리서 저자는 땅/하늘의 대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의 성소는 8:5절에서 말한 대로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로 하늘의 성소와는 대조되는 것이다. 성소의 첫 장막은 ‘성소’라고 불렸는데, 그 안에는 성소의 남편에 위치하고 있었던 등잔대(출25:31-39)와 북편에 위치한 진설병이 있는 상(출25:23-30)이 있었다. 줄기의 양편에서 뻗어 나오는 세 개의 가지로 금박이 되어 있었는데, 여섯 가지들은 온 종일 켜 있는 꽃 모양의 등대받침을 지지해 주었다. 상 위에는 열두 개의 떡이 두 열로 각기 여섯 덩어리씩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소에 있어야 할 품목이 금향로인데 히브리서 설교자는 3절에서 이것이 지성소 안에 있었다고 말한다.
3~5절 : 지성소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부른다. 그 안에는 금 향로와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 판들이 있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그룹들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금 향로로 번역된 ‘수미아테리온(θυμιατήριον)’의 위치다. 수미아테리온이 향을 담아놓는 용기를 가지키는지, 아니면 분향단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많은 영어 성경들은 분향단의 의미로 ‘altar of incense’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금 향단은 지성소 커튼 바로 앞 성소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출30:6; 40:26). 또 다른 문제는 구약성경에 보면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언약궤 앞에 두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출16:33-34; 민17:10).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언약궤 안에 두었다고 한다. 안전을 위해서 이후에 언약궤 안에 두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고민을 알기라도 한 듯이 이것들에 관하여는 낱낱이 말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 말을 통해서 설교자는 지성소와 성소 안에 어떤 물건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관심이었을까? 이어지는 구절에 잘 나온다.
6~7절 : 제사장과 대제사장
제사장들은 첫 장막인 성소에 들어가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등잔의 불이 켜져 있는지를 살폈고 향로에 향을 사르는 일을 했다(출27:20-21; 30:7-8). 일주일에 한 번씩 상 위에 있는 진설병을 교체하는 일도 하였다(레24:8-9). 그러나 제사장들은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레16장). 먼저는 자신을 위해, 다음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렸다. 이 제사는 반드시 피를 드리는 제사여야 했다. 피는 9~10장에서 제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9:12, 13, 14, 18, 20, 21, 22; 10:4, 19, 29). 9:18절과 22절에서는 ‘피가 없이는’이라는 의미있는 문구를 반복하는데, 이것은 피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매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피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8절 : 성령께서 보이신 것
이 구절은 구약성도들에게는 보여지지 않았던 것이 성령을 통해서 제의적인 주제들이 가지는 깊은 의미가 드러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령은 장막의 첫 구획이 제의적인 역할을 하는 한 ,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Cody, Michel, Bruce, Hughes, Peterson, Ellingworth등과 같은 학자들은 2절과 6절에서의 첫 장막은 이 땅의 성소의 외부 장막을 의미하고 8절에서는 이 땅의 성소 자체를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Westcott, Willaim Lane, Attridge, Norman Young과 같은 학자들은 공간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2절과 6절에서의 사용과 동일하게 이 땅의 성소의 외부 장막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두 번째 견해에 동의하는데, 같은 단락에서 동일한 단어를 다르게 이해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시내산 언약이 여전히 구원에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는 한 거룩한 장소로의 입성은 가능하지 않다. 첫 장막, 즉 제의적인 활동의 영역인 성소가 폐지되어야만 접근할 수 있는데, 첫 장막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9~10절 : 양심의 문제
장막의 첫 구획은 현 시대의 상징으로 개혁의 때가 옴으로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한다. 개혁이 필요했던 이유는 첫 언약의 제의 규정이 가지는 약점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옛 언약 하에서 드린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 인간의 죄의 근본적인 문제는 양심의 문제였는데, 이 땅의 성막에서 드려진 제사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기껏해야 육체와 관계해서 정결을 가져다주는 정도에 그쳤다. 이 부분에서는 옛 언약 제사의 한계를 지적하며 양심과 육체의 대조를 다룬다. 이것은 새 언약의 제사인 그리스도의 제사와 옛 언약의 제사인 동물제사의 효과를 설명하는 13~14절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된다.
2. 본문주해(히9:11~22)
본문개관
옛 언약에 속한 땅의 성소에서 이 땅의 대제사장이 드린 제사는 양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면 새로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제사는 어떨까? 이 단락에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 성소에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드림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이 영원한 속죄는 사람들의 양심을 깨끗케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 단락을 이해할 때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제사와 피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특히 16-17절의 ‘디아데케(διαθήκη)’를 어떻게 번역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단어는 언약 (covenant), 유언 (testament 혹은 will)로 번역될 수 있다. 대체로 이 단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15, 18, 20절에서는 ‘언약’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6~17절을 번역하면서는 NAS, NAU, YLT 등 아주 소수의 영어성경만이 언약(covenant)으로 번역할 뿐 대다수의 경우는 유언(will이나 testament)으로 번역한다. 우리말 성경인 개역개정성경도 ‘유언’으로 번역했다. 같은 단락 안에 등장하는 단어를 다르게 번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을 만든 자가 죽어야 효력이 발생하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다는 내용에 근거하여 17~18절에서 대부분의 영어성경번역자들이 ‘유언’으로 번역한 것 같다. 16~17절은 유언으로 번역하고 18절에서는 다시 언약으로 번역한다. 분명한 이유 없이 같은 단어가 같은 단락에서 다르게 번역된다. 필자는 이 단락에서 사용된 디아데케(διαθήκη)는 모든 구절에서 ‘언약’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9:15~22절의 단락은 일반적인 언약체결의 배경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깨뜨려진 시내산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언약이 깨뜨려졌으므로 죽음의 저주가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 언약이 죄를 사할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며 앞의 단락에서 말한 광야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의 예가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옛 언약을 인준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죄에 의해서 야기된 저주의 모든 요구사항들을 다 충족시키는 제사임에 틀림없다.
절별 주해
11~12절 :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서의 제사
이 땅의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동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처럼 예수께서도 하늘 성소에서 피의 제사를 드리셨다. 그런데 옛 제사와 그리스도의 제사의 평행이 여기서 깨뜨려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제사장임과 동시에 친히 제물이 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서 더 분명하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대속죄일 희생제사의 피는 성소 밖에서의 제물의 죽음과 성소 안에서 일어나는 속죄의 행위를 연결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3~14절 : 그리스도의 피와 양심
이 구절의 논증은 9~10절과 대조를 이룬다. 히브리서 저자는 동물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라는 Qal Wahomer 기법을 취하고 있다. 논증의 가벼운 부분은 육체를 정결케 하는 부분과 관련이 있고, 무거운 부분은 새 언약의 내적인 속성과 관련되어져서(8:10~11; 10:16)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죄를 사하는 효과가 있는 그리스도의 제사에 대해서 다룬다. 13절에서의 ‘가벼운 것’에 해당하는 논증은 언뜻 보면, 이전에 히브리서 설교자가 했던 논증들(7:11, 18; 8:7-8, 13; 9:9)을 약화시키고, 앞으로 언급하게 될 내용들 (10:1, 4)과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제사가 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외적/내적, 육/영의 대조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드리심은 죽은 행실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악한 양심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은 10:22-25절의 권면 부분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 구절에서 ‘디아 프뉴마토스 아이오니우(διὰ πνεύματος αἰωνίου)’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영어성경들도 성령으로 이해하여 ‘through the eternal Spirit’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논증으로 볼 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영적인 영역,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의 내적인 속성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가 인간의 내적인 부분인 양심, 마음, 생각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도록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도 영원한 영으로 드려지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이어서 10장에서 순종의 제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는 단락과도 잘 조화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15~17절 :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과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없애고자 죽으셨다. 15절에서 ‘기업의 약속’이라는 표현 때문에 많은 학자들과 성경번역자들이 16~17절의 ‘디아데케(διαθήκη)’를 ‘유언’이라는 말로 이해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첫 언약과 관계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만약 첫 언약이 깨뜨려지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면, 새 언약을 말하면서 죽음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 언약이 깨뜨려짐으로 언약의 당사자였던 자는 마땅히 죽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첫 언약 당사자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중적인 기능을 가진다. 먼저는 그는 첫 언약의 파기로 말미암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했다. 언약을 어겼을 때 언약한 자가 죽어야 하는 규정을 따라 그리스도가 죽으셨다(16절). 두 번째로 그렇게 함으로 옛 언약이 끝나게 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언약이 가능하게 한 중보자가 되셨다(15, 17절).
18~21절 : 언약의 피
언약 절차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나온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비준에 대해서 언급한다.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언약과 희생 제사의 피의 관계다. 첫 언약도 피를 통해 세워졌는데, 모세가 피를 제단과 백성들에게 뿌리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대해 설명한 출애굽기 24:3-8절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21절에 나오는 물, 붉은 양털과 우슬초는 출애굽기 24장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데, 물과 우슬초는 민수기 19장의 암송아지 제사에 나오고, 물, 붉은 양털과 우슬초는 레위기 14:4~7절에서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었다. 13절에서 대속죄일의 묘사에서도 옛 언약 하의 여러 제사들을 함께 가져와서 묘사했던 것처럼, 이 구절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22절 : 피를 통한 정결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의 원칙이 옛 언약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옛 언약과 새 언약 둘 다에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를 펼쳤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원칙은 두 언약에 다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은 죄를 없애는데 있어서 희생재물의 피가 중요하다는 구약성경의 일반적인 인식(레 17:11)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새 언약에도 적용이 된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의 차이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더 낫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 단락에서 그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10장에 가면 더 분명해진다.
3. 본문주해(히9:23~28)
본문개관
이 단락에서는 땅/하늘의 대조 중에 하늘 부분이 다루어진다. 하늘의 모형에 해당하는 땅에 있는 것들은 송아지와 염소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될 필요가 있었다면(19-22절),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에 의해서 깨끗해져야 한다(23절).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땅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하늘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 이 땅의 제사장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동물의 피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끝에 나타나셔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없이 하시려고 단번에 자기를 드리셨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긴다. 예수께서 깨끗하게 하신 하늘에 속한 것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크게 두 가지 의견으로 모아진다. 첫째는 그것들은 ‘하늘 자체’라는 의견이다. 사람들의 죄가 이 땅의 영역은 물론 하늘 성소까지 더럽혔기에 결정적으로 정결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Spicq, Riggenbach, Ellingworth, Lane, Craig Koester 같은 학자들이 이 입장을 견지한다. 두 번째는 ‘하늘의 것들’은 사람을 의미한다는 견해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학자들은 이 하늘의 것들은 하나님의 집인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엡 2:22; 히 3:6 참고) 그들은 정결해 져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로는 Luther, F. F. Bruce, Montefiore 등을 들 수 있다. 이 두 번째 입장 중에서도 Attridge 교수는 약간 다른데, 그는 13~14절에 근거해서 인간 존재의 영/육의 대조가 하늘/땅의 대조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속한 것들을 정결하게 하신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내적인 부분, 즉 양심과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몸-성전 유형론(body-temple typology)은 Philo나 다른 유대문헌에도 등장한다. 필자는 두 번째 입장을 따른다.
절별 주해
23절 : 더 좋은 제물
23~28절에서 저자는 11~12절의 승리적인 선언을 더 정교하게 설명한다. 그의 관심은 하늘의 성소와 제의, 그리고 구속역사의 완성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피의 객관적인 효력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22절에서 정결케 하는 원칙이 제시되었고, 그것에 따라 자연스러운 추론이 이루어진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들, 두루마리, 사람, 성막과 제의에 필요한 여러 물건들이 동물의 피와 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통해 깨끗하게 되었다면(19절),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에 의해서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 앞의 단락개관에서 ‘하늘에 있는 것들’은 하늘 성소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밝혔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것들도 더럽혀져서 깨끗케 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죄의 결과가 단지 이 땅의 영역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즉 부정함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방애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더 나은 제물이 무엇일까?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밝힌다.
24~26절 : 자주와 단번에
하늘에 있는 것들을 깨끗이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천상에서의 초월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것을 통해 8:3~5절에서 천상의 대제사장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피상적으로 다루었던 것을 좀 더 분명히 하고자 하는 의도를 느낄 수 있다. 천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제사를 설명하기 위해 땅의 의식을 가져다가 설명하는데 대응이 되는 것은 대속죄일 제사다. 크게 몇 가지 두드러진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지은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하늘(성소)에 들어가셨다.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고자 하심이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그리스도가 나아가심을 통해 그의 구원하시는 행위가 영원한 효과를 갖고, 또한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단락에서 ‘하늘/땅(heaven/earth)’과 ‘참/모형’의 대조가 나타난다. 둘째로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인간을 정결케 하시기 위해 땅의 대제사장들은 동물의 피를 들고 나아갔지만, 그리스도는 자기를 드리셨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25절에서 ‘다른 것의 피’라는 표현을 통해 짐승의 피를 통한 제사에 대해서 언급한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짐승의 피에 대응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를 언급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피라는 표현 대신에 고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로 드린 제사는 단순히 피에 대한 강조만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매년 대제사장들이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세상 끝에 나타나셔서 단번(하팍스 ἅπαξ)에 자기를 드리셨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죄를 제거하기 위해 역사의 클라이막스에 단번에 나타나셨다. 이것은 레위 대제사장들의 제의적 행동을 설명하는 ‘자주/여러 번(폴라키스 πολλάκις)’과는 대조된다. 지성소에서 레위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 피뿌리는 것의 예표론적인 성취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이 구절에서 ‘여러/하나(many/one)’ 대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7~28절 : 재림과 구원의 확실성
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은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의 이미지의 전개에 도움을 준다. 사람이 ‘한번’ 죽는다는 것은 역사적인 절정에 한번 발생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유일성과 연결된다. 죽음이 ‘한번’ 발생하는 인간적인 공통된 경험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인 행위가 갖는 구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유추를 제공한다. 여기서 심판의 주제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앞으로 히브리서에서 다루어질 권면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10:27~31; 12:18~24). 죄를 없애려고 그리스도가 첫 번째 나타나신 것과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신 것은 제의적인 배경에서 이해하야 하는 내용이다.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다는 말은 속죄일에 일어난 장면을 유추해서 이해할 수 있다.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간 후 그가 다시 나올 때까지 성막 밖에서 기다렸다. 대제사장의 등장은 하나님께서 그가 드린 제물을 받으셨다는 확신을 주었다. 기원전 2~3세기의 유대인의 글에 대제사장 시몬이 속죄일 예식을 관장한 내용을 적고 있다. “그가 지성소로부터 나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였을 때 그는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 히브리서 설교자는 대제사장이 직무를 마치고 지성소에서 나오는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시키고 있다. 24~28절은 대제사장의 움직임을 담고 있는데,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을 드림으로 백성들의 죄가 깨끗케 되었다. 그리스도는 그 일을 다 마치신 후 다시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시는데, 이 재림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희생제사의 효력에 다른 어떤 것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 세력을 멸하고(2:14),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은 해방시켰다. 그의 다시 나타나심은 그의 희생제사가 인정되었고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복을 확증했다는 증거가 된다. 구원의 상속자가 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들의 기업의 온전한 향유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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