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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4_히브리서 4장 주해)
김영권 2016-04-11 추천 0 댓글 0 조회 1069

 

히브리서 주해 (4)

 

1. 본문주해(4:1~11)

 

본문개관

이 단락에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제시켰던 안식의 특징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2:2절을 사용함으로 시편 95편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해준다. 이러한 해석법은 유대인들이 널리 사용했던 것으로 게제라 솨와(gezera shawa)’라고 부른다. 이 해석법의 특징은 어떤 성경구절에 특정한 단어가 나오고 다른 구절에도 동일한 단어가 등장하는 경우 그 두 구절들을 함께 연결시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 단락에서는 창세기 2:2절에서 쉬다, 안식하다의 의미를 지닌 카타파우오(καταπαω)동사가 사용되었고, 시편 95:11절에서도 안식을 의미하는 카타파우시스(κατπαυσις)’가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시편 95:11절의 내 안식이 창세기 2:2절의 창조사역 후의 하나님의 안식과 연결되어 이해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4:1-11절은 안식에 들어가다라는 동사가 1(“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11(“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에 사용됨으로 수미상관 구조(인클루지오 inclusio)를 이루고 있다. 이 단락은 다시 1-5, 6-11절로 나누어질 수 있다. 1-5절에서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6-11절에서는 오늘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부여된 기회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이 두 단락의 중심에 시편 95편이 있는데, 3절에서는 시 95:11절이, 7절에서는 시편 95:7b-8a이 인용되었다. 앞의 단락인 3:12-19절이 믿지 아니함 (아피스티아 πιστα)’이라는 단어를 통해 노골적인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광야 세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식에서 배제된 것을 다루었다면, 4:1-11절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의 상속자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단락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현재 하나님의 백성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안식의 기회 중에서 지혜롭게 양자택일하기를 권하고 있다.

 

절별 주해

1~2: 안식에의 약속

히브리서 저자는 이 단락을 두려워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지만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염려하고 있다. ‘약속(에팡겔리아 παγγελα)’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인데, 히브리서에서 여기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믿음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로 간주하고 있다(1:14; 6:12, 17; 9:15 참고). 안식에 들어갈 약속의 유효성은 3:15절에서 시편 95:7b-8a를 인용하며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말한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논리적인 결과이다. 그러면 광야 세대의 백성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2절에서 답을 제시한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에 따르면 그들의 실패는 그들이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은 것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는 다르다. 원문을 살려 번역하면 이렇다. “그들이 들은 자들과 믿음으로 결부되지 (연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광야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러면 들은 자들은 누구인가?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여호수아와 갈렙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히브리서에서 그들이 안식을 누린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이 구절에서 들은 자들은 새 언약 백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4:3절에서 믿은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새 언약의 우월성과 새 언약 백성의 특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게 된다. 참고로 11:40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이(새 언약 백성인)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의 행적을 보면 우리는 기가 죽는데,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히브리서의 논지와 맞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의 행동이 의미 있게 되고 완전해지려면 새 언약 백성인 우리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의미다. 마치 릴레이 경주의 마지막 주자처럼 옛 언약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달린 후에 마지막 바통이 새 언약 백성인 우리에게 넘겨졌다. 우리가 완주해야 그들의 달음박질도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는 우리와 하나가 되지 않음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함이었다.

 

3~5: 우리와 그들

히브리서 설교자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은 우리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그들을 대조한다. 3절에서 시편 95:11절을 인용하며 광야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창세기 2:2절의 말씀으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안식을 누리셨고 지금도 누리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누리시고 계시고 그의 백성들을 초대하고 있는 그 안식은 무엇인가? 광야 백성들이 목표로 삼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무엇인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며, 지상적이지 않고 천상적인 안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안식으로 초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기에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닫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오늘 여전히 자기의 안식으로 그의 백성들을 초대하고 계신다.

 

6~8: 안식은 남아있다

하나님의 안식은 누군가를 통해 성취되기 위해 남아 있다. 불순종했던 광야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여전히 새 언약 백성에게 안식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광야 시절 이후 수 세기가 지난 시점에 하나님은 다윗의 글을 통해 다시 오늘이라고 말하심으로 약속을 누릴 가능성을 열어 주셨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옛 언약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 만약 그가 주었더라면 시편 95편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시편 95편에 있는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언급은 단순히 출애굽 세대와 시편의 말씀을 들은 당시의 독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편의 말씀은 새로운 복음 자체의 선포를 의미하고 믿음을 가진 누구에게나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8절에서 시편 저자는 여호수아에 대해 언급한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었다면 이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여호수아는 헬라어로는 예수스(ησος)’. 예수님과 이름이 같다. 옛 언약의 아르케고스(ρχηγς 리더)’는 그의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지만, 새 언약의 아르케고스이신 예수님은 참된 안식으로 언약 백성들을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9~11: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창세기 2:2절의 하나님의 안식은 반복되는 7일째의 안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대전통에서 많이 다루었던 것처럼 종말론적인 구원의 완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복된 소식의 실체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쉬신 것처럼 안식에 들어가는 자도 자기 일로부터 쉰다. 여기서 안식에 들어간 자는 누구인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는 이 땅에서의 삶을 믿음으로 마감한 성도들이다. 특히 그들은 힘든 박해의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게 되었다. 다르게는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인 예수님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분이 그의 백성들을 하늘의 영광으로 인도한다. 예수님이 안식에 들어가셨다는 언급은 없으나 하늘보좌 우편에 앉으신 승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이 그의 백성들을 인도한다. 이런 이해를 통해 그리스도와 백성 사이의 일체감을 볼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식에 들어가려고 힘쓰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2. 본문주해(4:12~16)

 

본문개관

4:12~13절은 신약성경에서 문맥과 상관없이 이해되는 대표적인 구절 중의 하나다. 그러나 4:12~13절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두 구절은 형식적으로는 시편 95편과 연결되며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시편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적절한 생각을 담고 있다. 이 구절에서 드러난 이미지는 대담하고 힘이 있다. 4:14~16절에서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4:14절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이심에 대해 히브리서에서 세 번째로 언급하는 구절이다. 2:17-183:1절에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언급할 때는 신실하심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는 성육신, 고난,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철저한 순종으로 동참하셨다. 이것은 사탄이나 광야세대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반응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특히 3:1~4:13절의 단락에서 인간의 불순종의 비극과 그 결과로 광야에서 엎드러진 자들의 시체(3:18)에 대한 언급은 자비로운 예수님을 강조하는 4:14-16에서의 밝은 권면과는 아주 대조적인 배경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의 시련에 직면하였는데 모세와 천사들이 그들과 함께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으로 죽었던 것을 지적하며 히브리서의 청중들을 향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시련에 처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더 의지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그 분은 천사들 보다 우월하고 (1:5~2:14), 모세보다 충성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3:1-6). 4:14~16절은 2:17~18절에 나오는 주제들을 다시 다루고 있으나 단순히 반복하지는 않는다. 이어지는 단락인 5:1-10절과 히 7장에서 다루게 될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직, 즉 히브리서의 논증에 따르면 옛 언약에 속하는 제사장직과 대조되는 것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맛보기로 보여준다. ‘큰 대제사장’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이’ ‘죄가 없으신 분’ ‘그를 따르는 자를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과 같은 개념 속에서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

 

절별 주해

4:12~13: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도의 반응

이 구절들은 앞에서 말한 부분과 잘 연결이 된다.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λγος)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성경말씀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단락에서 자주 말해진 시편 95편의 말씀을 의미한다. 더 넓히자면 창세기 2:2절도 포함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시편의 말씀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칼에 비유되는데, 이것은 심판의 칼이 아니라, 의사가 환부를 도려내는데 사용하는 수술용 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고 마치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것처럼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판단한다. 13절의 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πρς ν μν λγος)’는 번역이 쉽지 않다. 개역개정에서는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로 번역되었지만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이다. ‘결산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사용된 로고스다. 12절에서는 로고스를 말씀으로 번역을 했는데, 13절에서는 결산으로 번역했다. 물론 로고스의 의미 중에 결산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바로 앞의 구절과 다르게 번역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로고스를 말씀 혹은 말로 번역하면 “to whom the word by us”가 된다. 동사가 없어 의미를 문맥에 따라 추측해야 한다. 이 의미를 문맥에 따라 살펴보면 “a word we must give in response to the word heard”. 우리말로는 우리가 들은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말씀을 드려야 하는 그 분께가 적절해 보인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을 쪼개고 감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반응하는 말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1~2장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대화를 살펴보았는데,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과 새 언약백성 사이의 대화가 나온다.

 

4:14: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예수께서는 큰 대제사장(아르키레아 메간 ρχιερα μγαν)’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흔하지 않은 표현이다. 대제사장을 위대한 제사장이라는 표현으로는 칠십인경 레위기 21:10절과 민수기 35:25, 28절에 등장한다. ‘위대한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은 파일로가 로고스에 대해서 언급할 때와 마카비113:42에서 시므온에게 사용되어졌기에 히브리서에서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미 선례가 있는(pleonastic)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설교자가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으로 그리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존재했던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과는 완전히 차별된 대제사장이라는 뜻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계보에 속하고 있는데 7장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이심에 대한 고백을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한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이어지는 '승천하신 이', 다른 말로는 하늘을 통해 올라가신(passed through the heavens) 라는 표현과도 관련이 있다. 1:3, 13절과 2:9-10절에서 이미 승귀에 대한 언급은 있었으나, 이 구절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구절은 이어지는 단락에서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고 또한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늘 성소에서 휘장 사이로 들어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6:19-20; 8:1-2; 9:11, 24; 10:20). 이러한 움직임은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유효성을 보증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게 해준다. 히브리서에서 여기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이미지는 히브리서의 구원론에 있어서 중요하다. 지상의 제사장들은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지만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4:15-16: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이러한 승귀하신 대제사장에게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굳게 잡아야 하는데(14), 왜냐하면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동정은 심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경험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예수님은 단순한 공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다. ‘죄는 없으시다는 의미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는 예수님의 무죄성을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신 분이다. 또 다른 의미는 임명하신 분에 대한 충성됨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사탄의 강력한 능력을 경험하셨다. 보통의 인간들이 하듯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굴복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사탄의 유혹과 권세에 복종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이런 측면에서 죄가 없으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와는 무관하시지만, 그분은 완전한 인간으로서도 죄와는 상관없는 삶을 사셨다. 이런 예수님의 죄 없으심은 이 땅의 대제사장과 다른 우월한 하늘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자질이다(7:26; 9:14). 이것이 바로 현재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라는 권면의 본질적인 기초가 된다. 단순히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혹은 자신 있게나아오라는 것이다. 은혜의 보좌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두 요소는 긍휼하심과 은혜다. 긍휼하심은 과거의 실패와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혜의 보좌는 속죄소’(9:5)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기꺼이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마음이나 돕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왕이 은혜를 베푸는 것과 견주어 볼 수 있는데, ‘때를 따라 돕는 은혜시기적절한 도움(timely help)’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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