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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3_히브리서 3장 주해)
김영권 2016-04-04 추천 0 댓글 0 조회 918

 

히브리서 주해 (3)

 

1. 본문주해(3:1~6)

 

본문개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신실함(2:17)의 주제가 이 단락에서 이어진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예수님의 우월하심을 다른 대상과의 비교를 통해 그것을 드러낸다. 1-2장에서는 천사와 비교했고 이 단락에서는 모세와 비교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중보적 일을 가장 신실하게 감당했고 주후 1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락에서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것은 후대의 에비오나이트 문서에 나오는 모세 기독론과 같은 이단적인 생각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본문에서 그럴만한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모세와의 비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입증함을 통해 드러내고자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으라는 실제적인 권면을 주려고 하는 목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단락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1절은 예수님과 모세의 비교를 위한 도입, 2~3절은 모세에 대한 예수님의 우월성 입증을 위한 예증적인 유비, 4절은 신학적 진술, 그리고 5~6절은 유비적 해석의 기초를 제공한다. 논증을 요약하면, 집을 지은 사람이 집보다 더 큰 영광을 차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우월하다. 그리고 모든 집은 지은 자가 있는 것처럼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하였다면, 예수님은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셨다. 그러기에 성도는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절별 주해

1

접속사 그러므로(호덴 θεν)’로 시작하는 것을 통해 이 구절이 앞의 단락과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단락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말한 히브리서 설교자는 독자들을 향해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통해 거룩하게 된 자들이기에 그렇게 불릴 수 있다(2:11). 또한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함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공유개념이 있다(메토코이 μτοχοι). 그러기에 한 사람이라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3:6 참고).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우리말로는 조금 어색한 문장인데 믿는 도리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고백(호몰로기아 μολογα)’이란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의 고백의 내용인 사도와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한다. 여기서 독특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형제들과 연합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그분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연상시킨다. 둘째는 예수님을 사도와 대제사장으로 묘사한다. 대제사장 되심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에 어색하지 않은데,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을 사도로 부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불렀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전하시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는 우리를 대신하는 대제사장으로 죄를 없이하는 일을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말은 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권면과도 잘 어울린다. 예수를 생각하고 바라며 그를 닮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의 삶에 필수적이다.

 

2~5: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어떤 이들은 이 부분에서 후기의 에비오나이트 문서들인 Pseudoclementine Homilies 3.47; 8.5~7Pseudoclementine Recognitions 4.5에 등장하는 모세기독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이 논증을 펼치고 있다고 하나 본문 속에서 그 증거를 찾기 어렵다. 이 단락에서는 모세가 언급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자로서 모세보다 뛰어난 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수기 12:6-8절에서 모세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하나님께 말했다고 나온다(33:11; 34:10 참고). 그리고 민수기 12:7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는 환상이나 꿈으로 뜻을 전하지 않고 직접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고 적고 있다. 물론 출애굽기 33:23절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을 보는 내용이 나오고, 민수기 20:12절에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내용이 나온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출애굽기 33:23절이나 민수기 20:12절과 같은 구절보다는 민수기 12:7절의 내용을 더 부각시켜 모세의 충성됨과 그리스도의 충성을 비교하고 있다.

 

모세와 예수님 사이에 병행되는 많은 공통점들이 있다. 첫째는 모세와 예수님 모두 보냄을 받았다(사도이신 예수님 cf. 3:1). 둘째는 모세와 그리스도 모두 신실하다고 인정을 받았. 셋째는 모세도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집과 관련된 사명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차이도 있다. 먼저는 예수님이 모세보다 더 뛰어난 지위를 가지신다. 예수님은 아들이고 모세는 종이다. 둘째는 이러한 신분의 차이는 사역의 차이로 드러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ν) 신실하였고 예수님은 집을 맡은 (에피 π) 자로 신실하였다. 셋째는 모세의 사역은 미래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사역은 현재에 유효하며 구약의 기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설교자는 이러한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5~6절에서 ...(μν...δέ)’를 사용한다. 이 헬라어 구문의 특징을 살려 번역해 보면 한편으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신실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다가 된다.

 

그러면 이런 비교를 하는 이유가 단순히 신학적으로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히브리서 저자의 관심은 실제적인 권면에 있다. 이 단락에서 핵심 단어는 신실함이다. 함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 신실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그의 신실함은 이미 2장에서 설명되었고 2:17절에 언급된 바 있다. 성도들도 동일한 신실함을 가지고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있으라고 권면한다. 이 말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쉽게 풀어 설명할 수 있다. “소망이 우리에게 주는 것을 담대하고 확신 있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굳게 잡아야 한다.” 그럴 때 그의 집,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한다. 3:6절에 나오는 잡는다’(카테코 κατχω)는 동사는 히브리서의 권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믿음의 길에서 떠나려고 하는 위기 상황 가운데 있는 독자들에게 가장 절실하고 구체적인 권면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그러기에 이 동사는 3:14(“견고히 잡고 있으면”)10:23(“굳게 잡고”)에도 나오고, 동의어인 크라테오(κρατω)’4:14(“굳게 잡을 지어다”)6:18(“소망을 얻으려고”,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 “잡으려고가 더 나음)에 사용되었다.

 

2. 본문주해(3:7~19)

 

본문개관

3:7~11절에서는 시편 95:7~11절의 내용을 직접 길게 인용한다. 그런데 한 번의 인용으로 그치지 않고 3:15절과 4:3, 5, 7절에서 다시 일부분을 인용한다. 3:7~11절에서도 히브리서 설교자의 구약인용의 특이한 방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시편 95편을 단순히 인용하는 형태로 하지 않고 지금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묘사한다(3:7). 시편 95편의 인용된 구절의 요지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거역하지 말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시험하고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성도들도 안식에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한다(8-11). 이것은 곧 과거와 현재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는 하나님의 행위가 일관성 있게 그려진다.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보고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비참한 결말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3:12-19절은 앞의 인용문에 대한 주석을 담고 있다. 특히 12절의 조심할 것이요(블레페테 βλπετε)’19절의 이로 보건대(블레포멘 βλπομεν)’에서 같은 동사가 사용함으로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고 있다. 12절과 19절에 나타난 불신앙에 대한 경고는 14절에서 견고하게 신앙을 유지하라는 것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단락에서는 광야시절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원인과 현재 공동체가 직면한 위험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헬라어 알파벳 알파(α)’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믿지 아니하는(12, 아피스티아 πιστα),’ ‘떨어질까(12, 아포스테나이 ποστναι),’ ‘죄의 유혹(13, 아파테 테스 하마르티아스 πττς μαρτας),’ ‘범죄한 자들에게(17, 하마르테타신 μαρτσασιν),’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18, 아페이데사신 πειθσασιν),’ ‘믿지 아니함 (19, 아피스티아 πιστα).’ 16~18절에서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신속한 답변을 통해 의도하는 바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절별 주해

7~11: 시편 95:7~11절 인용

시편 95편은 출애굽기 17장의 맛사와 므리바 사건과 민수기 14장의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편 95편의 히브리어 본문에서의 맛사와 므리바의 언급은 70인경에서는 그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성격을 묘사하는 거역(파라피크라스모스 παραπικρασμς)’시험(페이라스모스 πειρασμς)’으로 대체되었다. 설교자는 시편 95편의 칠십인경 번역을 취하고 있으나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70인경 시편 95:7~11절과 히브리서의 인용문 사이에는 크게 두 가지 차이가 있다. 하나는 칠십인경에서는 저 세대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세대라고 적고 있다(10). 또한 70인경에서는 40년이 하나님이 광야 세대를 향해 노하신 것과 관련이 있는데, 히브리서에서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행사를 본 것과 관련이 있다(9). 3:17절에서는 40년이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되어 등장하는데, 이것은 원래의 형태가 어떠했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이런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는 인용문을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로 시작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95(LXX 94)을 단순히 인용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성령께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12~14: 마음이 문제

광야 세대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시편 95편의 인용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마음의 완고함과 미혹됨이 문제였다(3:8, 10).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설교자는 12~14절에서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결과가 초래할 것이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인데(3:18; 4:2, 3, 6), 이것과 상반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하게 붙잡는 참된 마음이다(10:22, 23). 여기서 우리는 설교자가 생각하는 죄는 바로 내면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10장에서 외적인 육체의 예법만을 취급했던 옛 언약 하의 동물제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광야 40년이 오늘이다. 격려와 견책은 믿음의 공동체가 위기와 약속 사이의 긴장 가운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죄와 배교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은 오늘이라고 불리는 날 속에서 유효하다. 물론 이 오늘은 처음부터 확신한 것을 끝까지 붙잡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도록 하는 기회의 오늘이기도 하다. 이것은 시편 기자를 통해 선포된 과거의 오늘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계속되는 현재로서의 오늘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권면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동체적으로 피차 살피고 권면하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15~18: 세 가지 수사학적인 물음들

15절에서 시편 95:7절을 한 번 더 인용한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게 하시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이어서 질문-대답의 형식을 통해 시편에 언급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재미있는 것은 세 질문들은 시편 95편의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고, 질문에 대한 답은 민수기 14장의 기사에 근거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먼저 16절에 나오는 첫 번째 질문인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들이 누구냐?”는 시편 95:7-8절에 근거하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인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이란 답은 민수기 14:13, 19, 22절에 근거하고 있다. 두 번째 질문은 17절에 나오는데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는 물음은 시편 95:10절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답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이라는 답은 민수기 14:10, 29, 32절에 근거한다. 마지막으로 18절에 나오는 세 번째 질문인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여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는가?”라는 질문은 시편 95:11절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답인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는 표현은 민수기 14:30, 33, 43절에 근거하고 있다.

 

19: 불신앙의 결과

광야 세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시편 95:7b-11절에서는 불신앙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아니함(아피스티아 πιστα)’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멸시하고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민수기 14:11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을까? 민수기 14:1~3절에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온 회중은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급기야 하나님을 비난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시고, 모세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사죄의 은혜를 구한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모세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회개하며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말렉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패하고 들어가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맹세는 최종적이다. 그러기에 오늘 성도들이 취하는 반응은 매우 중요하다. 순종과 불순종, 믿음과 믿지 않음 사이에서 믿음과 순종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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