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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2_히브리서 2장 주해)
김영권 2016-04-04 추천 0 댓글 0 조회 727

히브리서 주해 (2)

 

1. 본문주해(2:1~9)

 

본문개관

1:5-14절은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해 일곱 개의 구약인용을 통해 설명했다. 이어지는 2:1-4절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첫 번째 권면으로 앞 장에서 펼친 논증에 근거해서 권면한다. 그러면 권면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누리게 된 새 언약 백성인 성도들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기지 말라고 말한다. 1장에서 히브리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 창조의 매개자이며 창조세계의 주관자로서의 그리스도, 천사들보다 우월하신 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했다. 즉 하나님, 세상, 천사들과 그리스도가 어떤 관계인지를 다루었다. 이제 2장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한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과의 관계다. 2:5-9절은 다시 주해로 돌아온다. ‘아들이 천사들보다 우월하다면 그가 고통당하시고 죽으신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반론에 부딪힐 수 있다. 설교자는 시편 8:4~6절을 인용하고 그것에 대한 기독론적인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되신 것을 설명한다. 그가 성육신하시고 죽음의 고난을 감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였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2:1~9절은 1:3절에 소개된 죄를 정결하게 하시는 일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영광과 존귀를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낮아져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고 다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게 되시는 과정을 거치셨다. 이 단락에 나타난 영광에서 비천으로, 비천에서 다시 영광으로의 주제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특히 여러 찬양시에서 발견되는 내용과 맥이 잘 통한다(2:5~11; 딤전 3:16; 벧전 3:18~22; 고후 13:4).

 

절별 주해

1: 들은 것에 유념하라

그러므로 (디아 투토 διτοτο)’로 시작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 구절이 앞에서 말한 것에 근거한 권면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들은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더 유념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데이 δε)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흘러 떠내려간다는 말은 배가 표류상태에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루터는 배의 키가 망가져서 안전한 항구에 다다르지 못하고 표류하는 것처럼, 성도가 구원의 항구에 이르지 못할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히브리서의 청중들이 어떤 위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위기 가운데 있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2~3: 구원을 등한시 하지 말라

이 구절에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논증방식이 있다. 그것은 칼 와호머(qal wahomer) 기법으로 문자적으로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란 의미다. 비중이 작고 낮은 단계에 있는 어떤 것을 설명하고 이어서 비중이 크고 높은 단계에 있는 것을 연이어 말함으로 뒤에 나오는 무거운 것을 더 분명하게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논증방식은 히브리서에서 이 구절 외에도 네 구절에서 사용되는데(9:13~14; 10:28~29

; 12:9; 12:25), “~하다면, 하물며 더 ~ 하지 않겠는가?”라는 식의 해석이 가능하다. 천사들을 통해 주신 말씀도 견고하여서 그 말씀을 어겨 범죄하거나 순종하지 않을 때 보응을 받았다고 한다면(2),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큰 구원을 등한히 하면 결코 보응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3). 이러한 경고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율법을 주셨다는 사상(요세푸스, 유대고대사15장과 136; 3:19; 7:38, 53절 참고)에 근거하여 말한다. 천사들이 중재자였던 율법도 얕볼 수 없는 것이었다면, 하물며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말씀은 더 유념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3절은 히브리서의 설교자가 누구였는지를 살피는데 도움이 되는 구절이다. 교회 역사에서 바울이 히브리서를 썼다는 설이 일반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바울 저작설을 대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3절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복음이 전해진 경로를 간단히 설명하고 있는데 -들은 자-우리의 순서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의 직접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바울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하나님의 확증

구원의 선포는 그리스도, 사도들, 성도로 이어지는 전통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역을 포함하고 있다. 주님이 구원을 선포하셨고, 하나님께서도 표적, 기사와 여러 가지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구원이 진리임을 증언하셨고, 성령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5: 장차 올 세상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현 세상은 천사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사상은 칠십인경 신명기 32:8절과 다니엘서에 나온다. 신명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직접 다스리시고 돌보시지만, 다른 민족들의 경우에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주관하게 하셨다고 적고 있다. 다니엘 10:13절과 10:20절에도 이런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이 세상을 보존하고 통치하는 일에 하나님을 돕고 있다. 그러면 장차 도래할 세상, 즉 구원의 시대는 누구의 손에 맡길 것인가? 히브리서 설교자는 천사들의 몫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6-9: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이 구절에서 시편 8:4-6절이 인용되고 해석이 주어진다. 시편 8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존귀한 존재, 즉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영광과 존귀를 누리게 하셨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고 적고 있다. 이 시의 사상적인 배경으로는 창세기 1-2장을 들 수 있다. 영광의 신학이 담겨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설교자는 이 구절에서 히브리어 본문을 인용하지 않고 헬라어 번역성경인 칠십인경(시편 8:5~7)을 인용한다. 시편 8편의 경우 히브리어 원문과 칠십인경 번역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인자와의 비교의 대상이 엘로힘, 즉 하나님이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칠십인경에서는 비교대상이 하나님에서 천사들로 바뀌었다. 그를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차이는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조금이라고 낮음의 정도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칠십인경에서는 브라쿠 티(βραχτι)’로 번역했다. 이 표현은 질적인 의미와 시간적인 의미 둘 다를 포함하는데, 히브리서 설교자는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히브리서에서는 시편 8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며, 만물이 그리스도께 다 복종하여야 하는데, 현재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하는 물음에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잠간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시는 성육신을 통해 죽음의 고난을 겪음으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영광과 존귀를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심은 큰 은혜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2. 본문주해(2:10~18)

 

본문개관

이 단락에서는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해 순종의 마음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구약의 구절들이 인용되고 있다. 1장에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티프가 강하게 드러났다면, 2장에서는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인 그리스도를 향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천사들을 명하여 아들에게 경배하라고 하셨고, 그의 보좌와 나라를 영원히 존재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고, “내가 네 원수로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이러한 아버지의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답하신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그리고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고 고백하신다. 1장과 2장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거룩한 대화(divine dialogue)가 있다. 특히 2:10~18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인간들과의 결속과 유대(solidarity)가 두드러진다. 특히 그리스도는 맏아들로서 책임감 있게 동생들을 잘 보살피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죄 많은 인간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영광으로 인도한다. 사람들과 같이 되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죽음은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마귀를 멸하였고, 죽음의 공포 가운데서 종노릇하며 살고 있는 자들을 자유케 하였다. 그러면 마귀를 이기게 한 승리의 요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심으로 그는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고, 연약한 인간들을 위한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어 고난당하는 자들을 도우신다. 흔히 히브리서의 구원론은 완전한 제사로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우리는 순종을 통해 사탄을 멸하시는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절별 주해

10: 고난을 통해 온전해 지심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 (디 혼 타 판타 카이 디 후 타 판타 δι᾽ ὃν τπντα καδιοτπντα)”는 누구일까?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묘사할 때 디아 δι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여 만물의 조성자요 주관자이심을 말한다. 전치사를 통해서 어떤 신학적인 내용을 표현하기에 전치사 신학(prepositional theology)’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치사는 어떤 사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데 유용한데, 잘 알려진 것이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 정치라는 링컨의 연설이 있다. 전치사 신학의 대표적인 구절로는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에크 κ) 주로 말미암고(디아 δι) 주에게로(에이스 ες) 돌아감이라를 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죄에서 이끌어 내어 영광에 이르게 하는 일에 그의 맏아들인 그리스도를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하셨다.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구원의 창시자라고 묘사한다. 그런데 이 창시자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아르케고스(ρχηγς)’인데 영어성경에서는 author, captain, leader, founder, prince, pioneer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captain, leader, pioneer는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말로도 리더혹은 선구자로 번역하면 적절할 것 같다. 이것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과도 잘 어울린다.

 

11~13: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순종

거룩하게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인 성도들은 한 근원에서 났다. 그러면 한 근원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담, 아브라함 등등 다양한 입장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하나가 된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공감하시고 순종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형제, 자매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부끄러워하지 않다는 말은 감정을 나타내는 심리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고백의 행위를 가리킨다. 부인하거나 거절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설교자는 시편 22:22절과 이사야 8:17절과 18절을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고백하는 형식을 취한다. 왜 그러면 이 두 구절들이 사용되었을까? 시편 기자와 이사야 선지자 둘 다 고난의 상황에서 이 말들을 하고 있는데, 이 구절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인용됨으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해 어떻게 완전하게 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신실한 아들이었다.

 

14~15: 죽음을 통한 승리

구원의 리더이신 그리스도의 고난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혈과 육에 속한 사람들처럼 그도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지니셨다. 우리말 개역개정에서는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자발성을 더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아우토스(ατς)’ 강조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스스로가 한 모양으로 함께 혈육에 속하심은 (he himself likewise partook of the same)”이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멸망시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종노릇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셨다. 순종과 죽음을 통해 마귀의 세력을 정복하고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교회사 속에서 악을 근절하기 위해 전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오해해 온 힘에 의한 정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하신 승리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악의 세력을 무찌르는 것이다. 2:14절은 이러한 사상을 잘 반영하는 신약성경의 구절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초대교회 교부들에 의해서 많이 인용된 구절 중에 하나다.

 

16~18: 신실하신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에 사람들과 같이 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붙들어 주고자 하시는 뜻이 있었다. 만약 천사들을 붙들어 주고자 하셨다면 그는 혈과 육을 취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리스도는 인간들과 같이 되셔서 시험을 받고 고난도 당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처럼 시험에 미혹되어 넘어지지 아니하고 신실하게 감당하셨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들의 죄를 깨끗케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리스도의 아들이심의 모티프가 우세했는데, 여기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이심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아들과 대제사장직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히브리서에서 시편 2:7절과 시편 110:4절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면 그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그의 신실함이다. 흥미로운 것은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는 구절들마다 신실이라는 단어가 앞이나 뒤에 등장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도 하나님께 신실하고 순종했다. 신실하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그러기에 고난당하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4:14~16절과 5장에서 다시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그런데 단순히 교리적인 차원만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큰 위로를 주는 권면으로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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