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주해 (13)
1. 본문주해(히13:1~9)
본문개관
히브리서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13장은 이전의 장들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특히 12장 후반부에 있었던 엄한 경고와 13:1-6절이 잘 연결되지 않는 면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13장 전체(George A. Simcox, Wilhelm Wrede, Edmund Jones, Theissen, Buchanan)나 일부(Charles Cutler Torrey; 1~7, 16~18, 22~25절)가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른 학자들은 바울 서신들과 형태상 일치시키기 위해 첨가했다고 주장하고(Franz Overbeck, Wrede, Torrey, Buchanan), 어떤 이들은 실제 바울의 편지가 첨가되었다(Simcox, Jones)고 주장했다. 그러나 단어나 주제를 고려해 볼 때 13장은 1~12장의 내용들과 잘 일치한다(R. V. G. Tasker, C Spicq, Floyd V. Filson). 13장의 핵심단락인 7~19절은 이전의 장들에서 다루었던 주제와 잘 연결된다. 단지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명료한 설명을 하고 있다. 13장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된다. 1~6절은 화평과 거룩한 삶에 대해서 말하고, 7~17절은 진정한 예배에 대해서, 그리고 18~25절은 마지막 인사로 구성된다. 그러나 매일의 성경읽기를 돕는 차원에서 편의상 1~9절, 10~17절, 18~25절로 나누었다. 먼저 1~9절은 일련의 딱딱 끊어지는 것 같은 스타카토식의 권면을 담고 있는 1~6절과, 기독교적인 예배에 대한 부분을 담고 있는 7~9절로 나눌 수 있다. 1~6절은 다시 화평과 상호적인 관심에 대한 권면을 담고 있는 1~3절, 개인적인 행동, 성적 도덕성, 물질을 향한 태도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다루는 4~6절로 나누어진다. 7절은 이전의 교회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으라는 권고를 한다. 8절은 이 구절의 앞 뒤 내용과 잘 연결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을 담고 있다. 9절은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대한 경계를 주고 있다.
절별 주해
1절 : 형제사랑
히브리서 설교자는 외적인 압력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내적인 공동체 윤리의 확립할 것을 강조한다. 10장에서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24절), 공동체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예할 것(25절)을 강조했다. 13:1~6절에서는 구체적인 행동양식을 제시한다. 1절에서는 형제사랑(필라델피아 φιλαδελφία)을 실천하라고 권면한다. ‘형제사랑’이라는 표현은 기독교문헌 밖에서는 비교적 드물게 등장하는 표현으로 대부분의 경우는 육신적인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기독교 문헌에는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데 언약공동체에서 요구되는 덕목으로 중요시되었다(cf. 롬 12:10; 살전 4:9; 벧전 1:22; 벧후 1:7; 클레멘트 1서 1.2; 허마스의 목자서 Man. 8.10). 히브리서 설교자는 일반적인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는 구체적인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 12:14절에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라’는 권면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어지는 권면에서 잊지 말 것과 기억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과도 잘 연결된다. 특별히 형제사랑의 위기가 있었다는 근거는 없으나 12장 후반부와 연결해서 흔들리지 않을 나라를 소유했다면 그것이 공동체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2:10에서 성도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3:1, 14)으로 연결시켰다.
2~3절 : 손님대접
2절에서 손님대접을 잊지 말라고 한다. 이 권면은 초대교회에서는 중요했는데, 당시 교회지도자들이 이동하며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천사를 대접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아브라함과 사라, 롯, 기드온, 마노아 사건을 연상케 하는데, 특히 부지중에 했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설교자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3절은 이전에 히브리서의 청중들의 삶에서 칭찬받았던 내용인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는 일을 할 것을 격려한다.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는 말은 청중들이 겪었던 고난과 비방(10:32~33)과 백성들을 위해 당했던 모세의 고난과 예수님의 고난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그들이 갇혀있는 동료의 입장에서 그들을 생각하고 돌볼 것을 권면하고 있다. 칼빈의 경우에는 바울 서신에서 교회론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이 단락에서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6절 : 결혼과 돈
4~5절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한다. 크리소스톰과 같은 사람들은 이 구절은 명령이 아니라 진술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도 가능하지만 웨스트콧이 말하는 것처럼 명령의 어조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이 단락은 레위기에 나오는 거룩 규정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레위기에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닮을 것을 요구하는 것(레 19:2)이 경제적인 부분(레 19:9-14, 33-37)과 성적인 부분(레 19:20, 29; 20:9-21)과 연관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신 약속(신 31:6, 8)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의 부를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6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해 시편 118:6절을 인용하여 응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시편 118편은 축제의 시인데 공동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하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이어지는 13:15절에서 찬송의 제사 속에서 구체화된다. 시편 118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도움에 대해서 고백하는데, 이 도움은 히브리서에서 신실하신 하늘 대제사장의 도움이 기억나게 한다(2:18; 4:16).
7~9절 : 과거의 지도자들
과거의 지도자들을 기억하라고 권면한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생각하라’고 번역되었다. 과거의 지도자들을 설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묘사는 ‘들은 자들이 확증한 것’이라고 적었던 2:3절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자세히 살펴보라고 한다. 여기서 ‘결말’로 번역된 단어는 ‘에크바시스(ἔκβασις)’다. 이 단어가 이 구절에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이 단어가 다른 곳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처럼 그들의 삶의 마지막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과거의 지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신실함, 다른 말로는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이 말은 6:12절에서 아브라함을 본받으라고 한 것, 12:2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8절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은 앞뒤 구절과 잘 연결된다. 이전의 지도자들은 떠났지만, 그들의 믿음의 궁극적인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영원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많은 이상한 가르침들은 생겨나고 없어지기도 하는데, 그리스도는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사용한 것은 10:10절과 13:21절인데, 히브리서에서 엄숙한 선언을 할 때 사용되었다. 학자들은 이 그리스도에 관한 선언의 과거, 현재, 미래적인 측면과 관련해서 다양한 해석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동일성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 9절은 다른 교훈들에 마음이 끌리지 않게 하라고 권면하는데, 이것은 7절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준 과거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주의하여 보고, 본받는 것과 더불어 청중들이 해야 할 일이다.
2. 본문주해(히13:10~17)
분문개관
히브리서 저자는 이 단락에서 다른 교훈 음식과 은혜를 대조한다. 마음은 음식에 의해 굳게 되지 않고 은혜로 굳게 된다고 한다. ‘음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관련해서 많은 논의들이 있었다. 요약하면 음식과 다른 교훈은 유대교 안에서 있었던 제의적 식사와 관련되어지지는 것 같다. 제사와 관련해서 지켜졌던 식사규정들은 히브리서 설교자가 앞에서 분명히 설명했듯이 효력을 잃고 지난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은혜의 근거는 제의에 의한 것이나 옛 제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있다. 예수께서는 피로써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성도는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의 그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13절에서 ‘그에게로 나아가자’는 많은 논란이 있었던 구절이다. 크게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세속적이지 않은 종교적인 경험으로 이 세상에 대해서는 초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는 것으로 이해한다(James Moffatt). 두 번째는 유대교로부터 떠나라는 뜻이다(F. F. Bruce, Floyd Filson). 세 번째는 이 세상의 문화와는 반대로 살 것을 권하는 것으로 본다. 성문 밖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욕당하고 치욕을 당하신 장소다(Helmut Koester). 영구한 도성이 이 땅에 없음을 알고 이 땅의 방식대로 살지 아니하는 자는 선행과 자선과 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 찬송의 제사가 필요하다. 여기서 제사는 은유적으로 표현되었다. 히브리서에서는 크게 3종류의 제사가 등장한다. 하나는 옛 언약 아래서 드려진 동물제사다. 둘째는 동물제사를 폐지한 그리스도의 제사다. 이것은 내적인 헌신과 순종이 있는 제사다. 그리고 새 언약 백성들의 삶에 필요한 것은 삶의 제사다.
절별 주해
10~12절 : 우리에게 있는 제단
7절과 9절에서 지도자를 기억하고 이단적인 사상을 피하는 것은 13장이 중요시하는 권면이다. 몇몇 제의적인 식사와 관련된 이상한 교훈에 대한 언급은 이 단락에서 구름판 역할을 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에게 있는 ‘제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성만찬상을, 다른 이들은 골고다나 십자가를, 또 다른 이들은 완전히 이상적인 순수하게 천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와 장막에서 섬기는 ‘그들’ 사이의 대조가 있다. 후자는 하늘 성소의 그림자인 이 땅의 성소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의 특징이 연상되게 한다(8:5). 그런 예배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제단으로부터 먹을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과 음식과 관련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데,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 다른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물질적인 제의에 열의를 가지거나 집착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과거의 유용하지 않은 옛 언약과 관계되어진 자들로 보는 것 같다. 그 이유를 11절이 설명한다. 짐승의 피는 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엑소 테스 퓌레스 ἔξω τῆς πύλης)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11절의 제사의 절차는 12절의 그리스도의 사역과 대응된다. 그리스도도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자 성문 밖에서 치욕을 당했다. 11절의 ‘영문 밖’과 12절의 ‘성문 밖(엑소 테스 파렘볼레스 ἔξω τῆς παρεμβολῆς)’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가 당한 고난은 이어지는 13절의 권면과 잘 연결된다.
13~14절 : 그에게 나아가자
그러기에 우리도 치욕을 지고 영문 밖에 있는 그에게로 나아가자고 한다. 위의 본문개관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본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가 치욕을 당한 것처럼 우리도 치욕을 당하는 것이다. 그 치욕은 이 땅의 가치관과는 달리 형제 사랑, 손님 대접, 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고, 결혼을 귀히 여기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청중들을 향해서 제시하는 제자도의 모습이다. 복음서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제단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것은 삶에서 그리스도의 치욕을 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14절에서 설명한다. 청중들은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10절),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종말론적인 전망이 두드러진다. 성도들은 장차 올 도성을 찾는 자들이다. 이 구절에서 이제까지 중요하게 다루었던 믿음의 사람들의 하늘 도성을 향한 순례 사상이 다시 언급된다(11:8, 15, 26-27).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것은 과거의 믿음의 사람들이 나그네임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새롭고 확실한 바탕 위에서 그렇게 한다.
15~17절 : 찬송의 제사
11~12절에 나타난 새로운 이미지의 두 번째 적용은 제의적인 모티프로 발전되는데, 그것은 바로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끊임없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 제사가 어떤 제사인가? 그것은 바로 찬양의 제사다. 옛 언약의 제사에서는 동물의 피를 드렸다.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감사의 제사다. 이것은 바로 그의 이름을 증언하는(호몰로군톤 ὁμολογούντων) 입술의 열매다. 여기서 사용된 ‘증언’이라는 단어는 이 땅에서의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그들의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11:13). 16절에서 ‘잊지 말라’는 권면은 13:1절의 권면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상호관심의 구체적인 행위가 있는 ‘선을 행하는 것’과 언약백성으로 삶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나누어 주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진정한 나눔의 일차적인 정황은 고난의 상황이다(11:33). 13장에서 권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했던 것처럼, 이 권면의 근거도 들고 있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다. 14절과 16절에서 11:1절의 믿음의 정의를 내릴 때 발견되었던 동일한 요서가 있다. 믿음은 성도들이 바라는 것들의 실현이고, 현재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만지는 것인 것처럼, 현재에 존재하고 또한 장차 오게 될 것에 관한 확신은 영문 밖에서 믿음의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된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제의적인 용어를 사용하지만, 15절의 제사는 피의 제사가 아니라 예배 행위다. 이 부분에서 제사로 규정된 것은 비제의적인 행위인 서로 사랑하는 것과 섬김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표현은 믿음 장을 설명할 때 에녹의 예를 들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던 것(11:5~6)과, 더 근접문맥인 12:28절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영문 밖에서의 새 언약 백성의 삶은 제의적인 영역밖에 있는 제의를 행하는 삶이다. 17절에서 현재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7절에서 과거에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통해 수미상관구조를 이룬다. 현재의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다가오는 미래의 심판에서 우리의 영혼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 되는 자들처럼 깨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로 하여금 근심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그 일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유익이라고 밝힌다.
3. 본문주해(히13:18~25)
본문개관
히브리서의 결론 부분인 18~25절은 히브리서에 대한 배경을 살피는데 몇 가지 도움을 준다. 먼저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준다. 그렇다고 아주 명확한 단서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에 대한 18~19절은 히브리서의 저자와 그 공동체와의 관계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 준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그들에게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히브리서의 설교자는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가 떠나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23절의 디모데에 대한 언급은 히브리서의 저자를 살필 때 바울과 관련된 가설을 세우고 주장하게 하는 하나의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디모데가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라고 하더라도 바울이 히브리서의 저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여러 요소들이 있다. 그러나 이 결론부의 내용을 통해서 히브리서는 로마에 있었던 교회들과 관련이 있고 바울의 영향권 안에 있는 교회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둘째로 히브리서의 장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단어가 22절에 나온다. 히브리서 저자는 자신의 글을 ‘권면의 말’이라고 지칭한다. 이 표현은 그 당시와 이전의 문헌들에서 설교를 의미했다. 히브리서는 한 편의 설교라기보다는 여러 설교를 담고 있는 글이다. 어떤 특정한 때에 설교되어지고 그것을 교회에 편지의 형식으로 보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히브리서는 설교형식의 글이다. 셋째는 히브리서의 결말 부분은 후대의 첨가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언급하는 내용이 이미 앞에서 말한 내용과 잘 일치하고 있다. 축복의 내용으로 평강, 언약,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말한다. 이 세 가지는 히브리서의 중요한 주제들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공동체를 향해 편지하며 마지막 부분에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절별 주해
18~19절 :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공동체의 현재의 지도자들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히브리서 설교자의 진술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 그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어떤 권위나 책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구절에서도 앞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권면을 주고 나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할 것을 당부하는데, 특이한 것은 ‘우리’라는 복수형태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는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등장하고 있다(살전 5:25; 살후 3:1; 롬 15:30; 골 4;3). 아마도 이것은 당시 편지의 관례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기도해 줄 것을 권면하는 근거는 거창하지 않다.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고 하는 자신의 양심이 근거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이전의 내용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하나, 7절에서 이전의 지도자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본받으라고 했던 것처럼, 그의 선행과 양심을 본받기를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이전에 자기가 속했던 공동체로 돌아가고자 한다.
20~21절 : 평강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이제까지 화평과 공동체의 조화를 강조했던 이전의 권면들과 잘 어울린다(12:14; 13:1, 2, 7, 17). 하나님에 대해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이라고 하는 부연설명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행위를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일으키다’는 단어가 아니라 ‘이끌다’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2;10절에서 영광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행위를 연상시킨다. 예수님을 ‘양들의 큰 목자’로 부르는데 이것은 예전적이고 교회론적인 전통을 담고 있다고 보는데, 베드로전서에서 유사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벧전 2:25; 5:4). 이사야 63:11절에서는 모세를 ‘양 떼의 목자’로 부르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큰 목자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할 때 그것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자격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히브리서 설교자는 ‘큰 대제사장’이라고 했다(4:14). ‘영원한 언약의 피’는 히브리서의 중심단락인 8-10장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의 의미를 밝힐 때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새 언약의 약속을 이루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죄를 깨끗이 하는 사역을 완전히 이루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런데 이 사역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고 세우시는 일에 동일하게 주체가 되신다. 21절에는 축복이 나오는데, 기도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성도를 선한 일에 온전하게 하셔서 그의 뜻을 행하게 하고(10:7, 9, 10), 하나님이 보시기에 ‘즐거운 것’을 성도들 가운데 이루시길 기원한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살피며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 믿음의 삶이요(11:5), 선행의 제사라는 것을 확인했다(13;16).
22~23절 : 권면의 말
히브리서 설교자는 자신의 글을 ‘권면의 말’이라고 하는데, 이 표현은 사도행전 13:15절에도 등장한다. 회당의 지도자들이 바울에게 회당설교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사용되었다. 이것이 히브리서를 설교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다. 베드로전서 5:12절에서는 자신의 설교의 내용을 지칭할 때 이 단어의 동사 형태로 사용하고 있다. 간단히 쓴 자신의 글을 용납하라는 말은 당시 관습적으로 쓰인 말이다. 23절에서 살아있는 인물에 대한 유일한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바로 디모데다. 그를 ‘형제’라고 부른다. 디모데가 놓였다는 것을 통해 그가 감옥에서 풀려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빌레몬서 1절에서는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힌 것으로 그린다. 어쨌든 히브리서 설교자는 디모데가 속히 돌아오면 그와 함께 청중들을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디모데가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더 이상의 정보가 없다.
24~25절 : 안부 인사
24절에는 두 번의 안부인사가 등장한다. 먼저 히브리서 저자는 먼저 그의 인사를, 그리고 이어서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안부를 청중들에게 전한다. 그의 인사를 받는 사람들은 인도하는 자들과 모든 성도들이다. 함께 있는 자들의 안부를 전하면서, ‘이달리아에서 온 자들’(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 οἱ ἀπὸ τῆς Ἰταλίας)이 안부를 전한다고 한다. 여기서 ‘아포(ἀπὸ)’는 ‘~으로부터’의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것에 근거해서 히브리서의 청중들은 로마 혹은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정보가 없기에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마지막 절에서 히브리서 설교자는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있기를 기원한다(헤 카리스 메타 판톤 휘몬. 아멘. Ἡ χάρις μετὰ πάντων ὑμῶν. Ἀμήν.). 디도서 3:15절에 정확하게 같은 문구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당시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형식이지만, 히브리서의 마지막 결론으로 적절하다. 히브리서에서 은혜는 매우 중요한 단어인데, 그것은 히브리서가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가 성도들에게 가능하게 되었음을 설명하는 글이기 때문이다(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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