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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6_히브리서 6장 주해)
김영권 2016-04-20 추천 0 댓글 1 조회 1554

 

히브리서 주해 (6)

 

1. 본문주해(6:1~12)

 

본문개관

이 단락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절까지는 5:11~14절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젖을 먹는 어린 아이의 단계를 벗어나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고 권면한다. 4~12절은 신약성경에서 해석이 가장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로, 믿었다가 타락하면 다시 회개하여 새롭게 될 수 없다는 엄한 경고를 담고 있다. 흔히 두 번째 회개가 불가능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구절로 이해되어온 6:4~8은 교회사 속에서 뜨거운 감자로 인식되어져 왔다. 이 구절은 해석상의 많은 난점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약성경 속에서 구원에 대한 약속과 확실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다른 구절들(10:28; 고전 1:8; 10:13; 1:6; 요일 3:6)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관계 때문에 이 구절은 교회사 속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한 예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 각자의 교리를 옹호해 주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 주는 구절로 사용되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구절이 바로 성도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했던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은 6:4~8절에 언급된 사람들은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히브리서의 상황과는 동떨어진 주장이다. 이 단락은 히브리서 저자의 목회적인 관심을 담고 있다. 특히 엄격한 경고(4~6, severity)에 이어 자연현상을 통해 엄한 경고를 누그러뜨리고(7~8, softening), 이어 독자들의 선한 결정을 기대하는 (9~12, capturing the goodwill) 방식으로 묘사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4~6절과 9~12절의 어조가 너무 다르다. 히브리서 저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수사학적인 장치를 통해 독자들이 배교가 아닌 선한 결정을 내리기를 촉구하고 있다.

 

절별 주해

1~3: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5:11~14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이 어린 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책망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고 권면한다. 논리적으로 이상할 수 있다. 아직 어린아이처럼 성숙하지 않은 자들을 향해 어떻게 심오한 가르침으로 나아가자는 것일까?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이 유아와 같은 자들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과거의 행적을 언급하는 9~10절을 보면 이들이 더 이상 초보적인 교육이 필요한 자들이 아니라,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회개와 믿음, 세례와 안수, 부활과 심판 같은 초보적인 교리를 다시 붙드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성숙으로 나아가자고 권면한다.

 

4~6: 엄한 경고

4~8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의 앞 뒤 구절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1~3절에서 저자는 완전한데로(perfection) 나아가야 함에 대해서 피력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4~6절은 바로 앞의 구절(1~3)에 제시된 권면의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타락에 대해서 언급한다. 세례, 구원과 용서의 은혜, 성령체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체험하고 타락하면 다시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경고한다. 특히 4절에서 저자는 어렵다는 단어 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불가능하다는 헬라어 아뒤나톤(ἀδνατον)’을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구원을 맛본 자들이 타락하여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는가? 어려운 문제다. 많은 학자들이 해답을 제시했다. 터툴리안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세례 후에 지은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교리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고, 어떤 이들은 실존적인 목회상황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 과연 어떤 의미일까?

 

7~8: 누그러뜨림

히브리서 설교자는 매우 엄한 경고 후에 자연현상을 통해 엄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다. 농사의 이미지로 설명한다. 땅에 농사를 짓는 자가 기대하는 채소가 자라면 좋지만, 비를 잘 흡수하는 땅이라도 잡초와 가시를 낸다면 그 땅은 저주 받게 될 것이다.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가지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설교자가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타락하는 것사이에 다른 중립적인 어떠한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는 청중을 향해 완전한데로 나아가는 것 외에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할 다른 길이 없음을 반대되는 그림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9~12: 선한 결과를 기대함

이 구절들을 잘 살펴보면 4~6절에 주어진 엄한 경고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 등장한다. 특히 9~12절을 살펴보면 4~6절의 경고를 과연 이들에게 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부드럽고 다정다감하다. 4-6절에서 경고를 할 때 불가능하다는 강한 단어를 썼던 것처럼 9절에서 확신한다(페페이스메사 πεπεσμεθα)’는 강한 신념의 단어로 시작한다. 또한 히브리서 전체를 통틀어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이 9절에 등장한다. ‘앞에서 말한 극단적인 상황은 너희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독자들의 과거의 선한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두 개의 상반되는 내용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을까? 히브리서 설교자는 고대의 수사학에 정통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6장에서도 고도의 수사학적인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4-6절에서 타락하는 것에 대한 매우 엄한 경고를 하고(severity), 이어지는 부분에서 열매를 맺는 땅과 맺지 못하는 땅에 대한 은유를 통해 앞에서 했던 극단적인 경고를 누그러뜨리고(softening), 마지막으로 독자들의 선행을 들어서 그러한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전한다(captatio benevolentiae, capturing the goodwill). 그러면 실제로 그는 그러한 극단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염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한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수사학적인 도구다.

그러면 왜 설교자가 이와 같은 수사학적인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가? 어떤 학자들은 6:9절에 있는 너희들은 구원에 가깝다는 말과 6:12절에 나타나는 게으르지 말라는 권고에 근거해서 타락의 위험이 히브리서의 청중들에게 실재하지 않는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단순히 신앙적으로 느슨해지는 것이 그들의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저자는 실제로 배교하는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있다. 이 구절에는 엄한 경고와(두려움이 감추어진) 확신을 통해서 실제로 아직 배교하지는 않았지만 배교의 위험에 직면에 있는 청중들을 확고한 믿음으로 다시 돌이키고자 하는 설교자의 목회적인 관심이 담겨있다.

 

2. 본문주해(6:13~20)

 

본문개관

6:1~12절에서는 타락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경고와 더불어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한 것들을 받은 자들을 본받으라고 권면했다. 이 단락에서는 약속한 것들을 받은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들어서 설명한다.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상속자라는 분명한 사실을 다루고 있다. 약속을 받은 자들에게 필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약속을 받았으면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약속의 상속자들이 가질 수 있는 물음이 있다. 과연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신가? 그분의 약속은 신뢰할 만한 것인가? 히브리서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셨던 약속을 어떻게 이행하셨고 현재 어떻게 행하고 계신가를 살핀다. 창세기 22:17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예를 들어 확실성을 제시한다. 또한 그 약속은 절대적으로 확실한데, 그 이유는 맹세와 더불어 주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백성인 성도들이 가진 소망은 이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에 의해 견고하게 된다. 실제로 맹세로 주어진 시편 110:4절은 어떤 특정한 약속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19~2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도의 소망의 근거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고상한 지위에 대해서 확증한다. 앞서 가신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목표이자 하나님의 약속의 진정한 내용인 하나님께 친밀하게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주셨다. 그는 미리 들어가신 분이기에 믿음 안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다. 이 단락이 히브리서에서 하는 기능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히브리서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께 나아감의 권면을 담고 있는 다른 구절들과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4:14~16; 10:19~25). 두 번째는 이어지는 7장에서 해석적인 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하나님의 맹세가 들어있는 시편 110:4절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절별 주해

13~15: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맹세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내용은 자손과 땅에 대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구절들에서는 창세기 22:16절을 인용하며 후손에 대한 약속만을 다룬다. 아마도 그렇게 한 이유가 땅에 대한 약속은 지금 믿는 자들에게는 하늘 예루살렘안에서 종말론적으로만 성취된다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4:1~11; 9:15; 11:13; 12:22; 13:14 참고). 이 약속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맹세로 그것을 확증하셨다.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은 자기 보다 더 큰 이가 없으시기에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 15절은 6:12절의 권면을 상기시키면서, 아브라함은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았다고 확실히 말한다. 이 구절과 11:17~19절에서 아브라함 사건은 인내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또한 그 약속들을 받기 위해서 기꺼이 소중한 것을 희생하고자 하는 용기가 청중들에게 요구되고 있다.

 

16: 사람들의 맹세

이 구절에서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맹세에 대해 말한다. 맹세는 더 큰 어떤 사람을 걸고 호소하는 것이고, 논쟁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확정하는 역할을 한다. 맹세는 언급한 말의 결정적이고 구속력이 있는 확증이고, 이미 만들어진 어떤 모순도 무효로 만든다. 구약 성경에서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6:13; 10:20). 또한 맹세 후에 거짓말하는 것은 십계명 중 제3계명을 위반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20:7; 5:11; 5:3~5). 실제로 맹세는 주장한 내용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비준해 주시기를 바라는 경건한 요청이다. 그래서 필로는 맹세는 어떤 논쟁적인 문제에 하나님이 증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선언했다.

 

17~18: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

17절은 여전히 아브라함 기사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아브라함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 즉 성도들에게로 예리한 전환을 꾀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을 받은 자로서 성도들은 구약의 기사와의 상관성을 인식한다. 성경에 나오는 기사들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그리스도인들과 연결시킴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18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미한다. 이 구절들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어떤 구체적인 약속과 맹세를 붙들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5:5~6절에서 언급된 구약의 두 구절들, 즉 그리스도의 아들이심을 말하는 시편 2:7절과 대제사장 되심을 말하는 110:4절을 히브리서 설교자가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해서 선포하고 동시에 맹세가 있었던 시편 110:4절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그것은 성도들에게 약속을 주는데, 그리스도의 높아진 지위는 그분이 하늘 성소에 먼저 들어 가셔서 중보자로 계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피난처를 찾는 우리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기에 우리에게 주신 약속과 맹세는 취소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나중에 고백의 형태로 표현된다(10:23).

 

19~20: 선구자 그리스도

이 구절에서는 당시 뱃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에 의한 해양 은유로서 닻을 사용한다. 소망을 영혼의 닻과 연결시켜서 확고함과 안정성의 개념을 전개한다. 그런데 여기서 독특한 것은 소망이 휘장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망은 종말론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에 우리가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느니라고 말하는 7:19절과 잘 연결된다. 소망은 구속의 완성을 바라게 하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다. ‘휘장 안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지성소를 의미하는데, 이곳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들어갈 순 없었고 오직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16). 그런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하늘 성소에 먼저 들어가셨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를 위하여는 그리스도의 제의의 대표성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이것은 나중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희생제사의 모티프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예수께서 휘장 안쪽에 계신 것은 우리도 역시 지성소에 들어갈 것이라는 확고한 약속을 담고 있다. 10:19~20에서 이것은 권면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러한 나아감의 주제는 예 언약 하에서의 철처하게 제한된 나아감과는 매우 다르다. 그리스도를 믿고 약속을 인내함으로 붙잡는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더 이상 공포 가운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담력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늘 성소에 먼저 들어가신 선구자(프로드로모스 πρδρομος)이신 예수님에 대한 언급은 2:10절에서 아르케고스(ρχηγς)라고 말했던 것과 잘 연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성도들이 하늘 영광에 이르도록 길을 걷고 있는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이 단락은 시편 110:4절을 언급하면서 끝을 내는데, 특이한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표현에 영원히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에서는 이 단어를 문장의 마지막에 사용함으로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은 이어지는 7장의 핵심주제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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