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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7_히브리서 7장 주해)
김영권 2016-04-26 추천 0 댓글 0 조회 2230

 

히브리서 주해 (7)

 

1. 본문주해(7:1~10)

 

본문개관

7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서 설명하며 멜기세덱을 끌어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논증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에 의존하고 있다. 데일 레처트(Dale Leschert)7장의 삼단논법적인 구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다.

b.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은 레위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들보다 우월하다.

c.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레위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들보다 우월하다.

이 주장을 위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창세기 14장과 시편 110:4절을 사용하고 있다. 창세기 14장의 내용을 재해석함을 통해서 멜기세덱이 아론과 레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레위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직보다 우월하다고 설명한다. 7장에서는 창세기 14장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설교자의 논증에 있어서 시편 110:4절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다. 7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10절은 멜기세덱과 그의 제사장직, 11-19절은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 20-28절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다룬다. 첫 번째 부분인 1~10절의 특이한 점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다는 것이다.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이 만나는 사건에 근거해서 멜기세덱과 그의 제사장직의 우월성에 대해 입증한다. 이 논증을 위해서 창 14장의 사건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창 14장의 내용을 A-A' 만남(1절과 10), B-B' 축복(1절과 6), C-C' 십일조를 드림(2절과 4)이라는 세 요소를 교차대칭구조(chiastic structure)로 잘 배열함으로써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축복과 십일조가 멜기세덱의 아브라함 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절별 주해

1~3: 멜기세덱과 아브라함

신약성경에서 시편 110:4절을 인용하는 책은 히브리서가 유일하다. 히브리서가 멜기세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기독교적인 글이라는 사실은 히브리서의 신학적 주장의 독특성을 짐작케 하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참고로 히브리서가 쓰여진 이후에 멜기세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기독교 문서로는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트리포와의 대화 (32.6)를 들 수 있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이전 단락들에서 시편 110:4절을 여러 차례 인용하거나 암시했다. 이 단락에서는 구약성경 중에서 멜기세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창세기 14장의 내용을 가져다가 설명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4장에서 안식에 대해 설명할 때 시편 95편의 안식에 관한 내용을 안식에 대해 다루고 있는 창세기 2:2절과 연관시켜 설명했던 것과 같은 게제라 솨와해석법이 여기서도 사용되고 있다. 7:1-2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의의 왕’ ‘평강의 왕이라는 어휘론적인 설명과 더불어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적고 있다. 7:3절에서는 멜기세덱의 신상에 대하여 창세기 14장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을 이용하여 아비와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과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라는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을 하고 있다.

 

4~5: 멜기세덱이 받은 십일조

1~3절에서 창세기 14장의 사건을 짧게 언급한 후에 설교자는 4~10절에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레위의 제사장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두 가지 증거를 들어 설명하는데 이 구절에서는 십일조를 들고 있다.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우월하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그를 족장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레위의 조상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지위는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이방인이 아닌 자기 형제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6~7: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함

반면에 멜기세덱은 레위인들과는 다르다. 멜기세덱을 설명하면서 다시 창세기의 사건을 언급하는데,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고 그를 축복했던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밝힌다. 멜기세덱이 레위 지파와 상관없는 자였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 속했다는 것과 연결되어진다(7:14; 8:4). 레위 자파에 속하지 않은 멜기세덱이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은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도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주는 부분이다. 이 내용은 7:14절과 8:4절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1절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면서 말하지 않았던 내용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자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6:13-20절에서 언급된 것임이 틀림이 없는데,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자라는 표현을 통해 히브리서 설교자는 율법과는 대조되는 더 나은 약속(8:6)에 대해서 논증을 펼칠 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족장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것은 단지 명령만을 받은 레위인 제사장들과는 대조되고, 또한 그런 아브라함을 멜기세덱이 축복한 것은 멜기세덱의 지위가 어떠함을 잘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두 번째 근거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논거는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 없는 사건들이 꽤 빈번하게 등장한다. 신하가 왕을 축복하는 경우도 있다(삼하 14:22; 왕상 1:47). 히브리서 설교자는 자신이 들고 있는 두 번째 논거의 예외적 경우를 깊이 고려하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하거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축복하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경우들을 염두에 두고 논증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다.

8~10: 멜기세덱과 레위 제사장의 차이

이 구절에서 멜기세덱과 레위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들 사이의 분명한 차이가 제시되고 있다. 멜기세덱이 어떤 인물인지를 다루었던 3절의 내용을 끌어온다. 레위 지파 제사장들은 죽음을 맛보는 유한한 자들이지만, 멜기세덱은 족보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항상 살아있는 자다. 이러한 차이는 앞으로 7:23~24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삶과 레위 제사장들의 유한성이라는 더 중요한 주제를 위한 기초가 되고 있다. 비록 삶의 유한성과 영원이라는 것이 7장 전반에 걸쳐 중요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멜기세덱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것은 레위가 아브라함을 통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이다. 10절은 레위가 어떻게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의 아버지의 허리에 있었다. 물론 아브라함이 레위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모든 이스라엘의 족장으로 그의 조상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면서 다시 창세기 14:17절에서 추론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을 언급한다. ‘만남1절에도 언급되었는데, 이런 측면에서 1-10절은 만남이라는 주제어로 수미상관구조를 이루고 있다.

 

2. 본문주해(7:11~19)

 

본문개관

멜기세덱에 대해 다루는 7장의 가운데 단락인 11-19절은 온전함을 얻는데 옛 시스템이 실패했다는 것을 시작과 끝에서 지적함으로 수미상관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단락에서는 시편 110:4절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옛 제사장직과 다른 새로운 제사장직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이것은 이어지는 9~10장의 논증, 즉 그리스도의 제사가 레위 제사장들이 드린 제사들보다 우월하고, 바뀐 제사장과 언약의 결과가 얼마나 다른지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된다. 이 단락은 11절에서 다른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에 대한 약속으로부터의 추론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효과적으로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서 문제는 레위 제사장들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시스템이나 제사장 직분이 근거하고 있는 율법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견해는 12절에서 또 다른 각도에서 설명되는데, 제사장 직분이 바뀌는 것은 모든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제사장직의 수립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레위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를 속한다는 것을 밝힌다. 언뜻 보기에는 이 사실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는데 걸림돌이나 약점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이 사실이 강점으로 다루어진다. 시편 110편에서 약속된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 속하는 자가 아니었고, 그리스도도 레위 지파가 아니었다. 더 중요하게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다른 반차에 속하는데, 그의 제사장직은 시편 110:4절에 언급되었듯이 불멸의 생명을 따라 된 것이다(15~17). 새로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등장과 더불어 연약하고 무익한 계명은 폐해졌고, 더 나은 소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18~19). 이 단락은 대제사장이라는 칭호를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를 단순히 변증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로운 제사장직의 수립을 통해 옛 제사 시스템과 제사장직의 폐지를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절별 주해

11: 레위 제사장직의 불완전함

이 구절은 히브리서의 설교자가 많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 중에 하나인 사실의 반대를 나타내는 조건문(4:8; 8:7; 11:15)으로 시작한다: “만일 레위의 제사장직을 통하여 온전함이 있었다면,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다른 제사장이 말해지고 세워질 필요가 있었겠는가?” 히브리서 설교자는 레위 제사장직이 온전함(텔레이오시스 τελεωσις)을 제공하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에서 많이 사용되어지는데(2:10; 5:9, 14; 6:1; 7:28; 9:9, 11; 10:1, 14; 11:40; 12:2), 이 구절에서는 델링(Delling)과 같은 학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단어가 제사장들의 성결과 관련된 전문용어로 사용되어지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시작된 새 언약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12: 율법도 바뀌어야

만약 레위 제사장직이 변경된다면(메타티세미 μετατθημι) 그 제사장직을 지탱하고 있는 율법의 변경(메타세시스 μετθεσις)도 요구된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제사장직의 변경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μετατθημι 동사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11:5절과 불완전한 현상적인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을 언급하고 있는 12:27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변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인 메타세시스(μετθεσις)7:18절의 폐지에 해당하는 아세테시스(θτησις)를 사용하여 이 단락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제사장직과 율법에 대한 부분적인 수정이 아니라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단락에서 언급되고 있는 율법은 단순히 개인의 행동을 위한 규범으로서의 개별적인 율법이 아닌 제의 공동체를 위한 제의 규정의 총체로 이해할 수 있다.

 

13~14: 예수님은 유다지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설명하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카타 텐 탁신 멜키세덱 καττν τξιν Μελχισδεκ)’ 제사장이라고 설명한다. 이전의 제사장직의 비효율성 때문에 생겨나게 된 새로운 제사장은 레위지파에 속한 자가 아니고 모세가 제사장에 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유다지파에 속한 자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히폴리투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설명하면서 누가복음 1:5절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가 아론의 후손이고 그가 바로 예수의 어머니와 친척이었다는 것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지파에 속하면서 동시에 레위지파에도 속한다는 이상한 논증을 폈던 것과 아주 다르다.

 

15: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

이 구절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란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의미가 모호한 카타 텐 탁신 멜키세덱(καττν τξιν Μελχισδεκ)’이라는 말을 카타 텐 호모이오테타 멜키세덱(καττν μοιτητα Μελχισδεκ)’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이 말은 멜기세덱의 방식을 따라혹은 멜기세덱처럼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호모이오테타(μοιτητα)’는 히 7:3절의 닮아서의 뜻을 지닌 아포모이오메노스(φωμοιωμνος)’를 상기시켜 준다. 데이비드 드실바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관계는 멜기세덱이 제사장 계보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ancestor)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으나 그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멜기세덱 계열의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보다는 다른 제사장이었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의미는 멜기세덱이 이스라엘 제의 체계 속에서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자이었으나 레위 제사장 보다 우월한 대제사장이 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또한 이스라엘 제의 체계에 속하지 않는 분으로서 동일한 방식으로 레위 제사장들보다 더 위대한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16~19: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1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레위의 제사장직을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전자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난 것이고 후자는 육체와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아서 된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시 110:4절을 들어 성경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11~12절에서 지적한 제사장직과 제사장직을 지탱하고 있는 체계의 변경의 필요성이 18절에서는 부정적으로 이전의 계명들을 폐기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19절에서는 긍정적으로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18~9절을 주해하며 에트리지 교수는 문제는 레위 제사장직의 사람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제사장직이 근거하고 있는 율법 혹은 전반적인 체계 속이 있었다고 잘 지적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시작은 단순히 율법을 수정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전적인 폐지를 초래하였다.

 

20~22: 더 나은 언약의 보증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레위 제사장직과는 달리 맹세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은 언약의 보증으로 제시된다. 이 구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내용상 다음 단락의 구절들과 잘 이어지므로 다음 단락의 해설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3. 본문주해(7:23~28)

 

본문개관

이 단락에서는 레위 제사장직과 그 제사장직이 바탕을 두고 있는 제의체계의 연약함과 비효율성에 근거해서 영원하고 유효한 새로운 제사장직의 우월성이 선포된다. 그 우월성은 신적인 맹세(20-22), 그리스도의 영원성(23-25),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지위, 성격, 업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레위 제사장직은 두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 첫째는 맹세의 여부다. 히브리서 설교자에게 있어서 맹세라는 것은 절대성과 영원성과 관련이 있다(6:17). 이 단락에서도 신적인 맹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이 되게 한다. 22절에 나오는 더 나은 언약은, 8장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질 것인데, 19절의 더 나은 소망과 연결되고 8: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로 묘사된다. 둘째는 예수의 불변하는 제사장직은 비영구적인 레위 제사장직과 대조된다. 죽음이 레위 제사장들의 사역을 영구적이지 못하게 막는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계셔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7:25).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주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4:14~16절과 10:19~25절의 중요한 권면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이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중보의 역할은 앞 단락에서 제사장직과 율법의 목적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18-19). 히브리서에서 제사장직은 히브리서의 큰 주제인 하나님께 나아감(access to God)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28절에서 제사장직과 하나님의 아들의 연결은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그 제사장직의 영구성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개념으로부터 초래된다는 것을 확증한다. 27절의 단번에 자기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제사는 8~10장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잘 요약한 표현이다.

 

절별 주해

23~25: ‘많은하나의 대조

앞의 구절인 20~2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을 설명하면서 맹세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맹세라는 단어는 6:17절에서 확증을 제공해주는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논의를 회상시켜준다. 시편 110:4절에서의 맹세는 7장 전체의 중심 주제인 새롭고 영원한 제사장직이 확실히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20~21절은 맹세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맹세에 의해 모든 논쟁을 끝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맹세 없이 되었지만, 그리스도는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는 하나님의 맹세를 통해 제사장 직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누가 더 우월한 제사장인가?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맹세에 의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다. 21절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설교자는 멜기세덱이 아닌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는 이란 말을 생략하고 네가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다. 20~28절에서 멜기세덱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22절에서는 새로운 개념이 소개되었다. 그것은 언약 개념인데, 히브리서에서 언약이라는 단어가 이 구절에서 처음 등장했다. 언약에 대해서는 8장과 9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그리스도가 맹세를 통해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과 그는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는 것을 연결시킨다. 새로운 제사장직은 율법의 옛 계명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제공한다는 것은 이미 19절에서 말한 바 있다. 이 구절에서는 예수께서 이 언약의 보증(엥귀오스 γγυος)’이 된다고 말하고, 8:6절에서는 언약의 중보자(메시테스 μεστης)’라고 말한다. ‘보증혹은 보증인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오는데, 이 단어는 빚을 청산하거나 약속을 이행할 계약의 담보와 같은 실질적인 보증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는 다른 사람의 보증인으로 자기 생명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보증()’이라는 단어는 인격과 생명을 자신의 말에 거는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 승귀,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심을 통해 새롭고 더 좋은 언약이 폐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증한다. 23~24절은 옛 제사장직의 시간적인 제한성과 새 제사장직의 영원성이 대조를 이룬다. 25절은 이러한 새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혜택을 적고 있다. 23~24절의 강조는 많은하나의 대조다. 레위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은 수효가 많고, 새로운 대제사장은 예수님 한 분이다. 옛 제사장들은 불충분하고, 불완전하고, 불확정적이었던 반면에, 예수님은 영원하고 최종적이시다. 그런 수적이 차이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옛 제사장들의 죽음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시고 그분의 제사장직은 영원하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다. 구원은 히브리서에서 미래의 종말론적인 기업으로 제시되지만(1:14; 5:9; 9:28),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도움을 통해 현재에도 누릴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항상 살아서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26: 대제사장의 인격적 특징

대제사장에 관한 인격적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개의 형용사가 사용된다. 그는 거룩하고(호시오스 σιος) 악이 없고 (아카코스 κακος) 더러움이 없으시다 (아미안토스 μαντος). 거룩한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으로 자격이 부여되었다는 의미다. ‘악이 없고는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악이 그를 지배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더러움이 없고는 제의적으로 정결하다는 의미다. 이 세 단어들은 단지 정적인 도덕적 특성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같아 지셨고 많은 시험을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거룩을 잃지 않으셨다는 의미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승천을 통해 죄인들과 분리되신 분이다. 시험과 적대 고난을 당하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영역으로 올라가셨다. 죄인들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분리는 도덕적인 것뿐만 아니라 중보사역을 위해 하나님 존전으로 나아가심을 의미한다. 또한 하늘보다 높이 되셨는데, 이 표현은 승귀를 위해 공간적인 비유를 사용한 것이다.

 

27: 단번에 자기를 드림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이 땅의 제사장들이 하듯이 먼저 자기를 위해 제사를 드리고 다음에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단번에 (에파팍스 φπαξ) 자기를 드리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일무이성과 최종성을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께 다른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을 드림으로 사람들이 죄를 해결하셨다. 이어지는 9장과 10장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는 더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그 논의를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그가 단번에 자기 자신을 드려 이루셨다는 것이다.

 

28: 영원히 온전케 된 아들

두 제사장직 간의 차이는 이 구절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해 진다. 레위 제사장의 직분은 율법에 의해 주어졌고 그들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는 맹세의 말씀을 통해 세워지셨고 그는 약점이 없는 온전한 아들이셨다. 2:10절과 5:9절에서도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이 두 구절에서의 강조는 고난을 통한 온전함이었다. 그리스도는 시험과 치욕, 그리고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순종하시고 위엄과 권능의 자리로 승귀하셨다. 그리스도의 승귀는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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